본문바로가기 푸터바로가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로고

  1. ENG
  2. 사이트맵 열기
  3. 메뉴열기

KREI논단

정부 보조금에 관하여

2025.04.14
55
공공누리 제 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5년 4월 9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몇 년 전 사회적 농업 관련 행사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빈으로 초대받은 정부 관료가 ‘사회적 농업을 하시는 농업인들께서는 지금처럼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지 말고 자립해서 그런 실천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납득할 수 없었다. 장애인, 치매 노인, 아동, 청소년, 청년 등 이웃의 불리한 여건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농사지으며 포용적인 지역사회를 만드는 실천을 지원한다는 것이 ‘사회적 농업 활성화 지원사업’이었다. 그이의 말은 ‘사정이 딱해서 정부가 돈을 조금 주는 것이니 가급적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게 좋겠다.’라는 뜻으로 들렸다.


  어떤 책에서 ‘자립(自立)이 아니라 연립(聯立)을 지향한다.’라는 글을 보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세상에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온전한 자립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해결하는 것과 도움을 받는 것, 즉 자율과 보조는 상충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립과 고립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보조받는 것과 의존하는 것을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흔하다. 수많은 보조금 지원사업에서 그런 혼동이 일어난다.


  보조금의 원천은 국민의 세금이다. 보조금 지원사업을 실행할 때, 그것은 농민이나 농촌 주민이 불쌍해서 공무원이 자기 쌈짓돈을 꺼내어 도와주는 게 아니다. 국민 세금을 필요한 곳에 할당하는 절차 중에 행정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지원사업의 도움을 받는 농민이나 농촌 주민은 ‘보조금은 도움일 뿐이고, 행정은 조력자(助力者)일 뿐이며, 책임은 나에게 있다.’라는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해야 한다. 그러나 돈 받는 사람은 돈 주는 사람 앞에서 당당하기가 쉽지 않다. 가끔은 도움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듯이 비굴해지기도 한다. 한편, 돈 주는 사람은 자기 도움이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식으로 생색내거나 거들먹거리기 쉽다. 그 앞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은 농민이나 농촌 주민을 자주 만난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보조금 지원사업 업무를 처리하는 공무원의 인성이 문제라는 비난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공무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행정 체계의 작동 원리가 문제다.


  2년 전에 ‘돌봄농업 지원사업’이라고 명칭이 바뀐, 사회적 농업 지원사업은 2018년에 처음 시작할 때부터 ‘불리한 여건에 있는 청년’을 사회적 농업의 이름으로 돕기 시작했다. 밑천 없이 농촌으로 이주해 온 청년이 사회적 농장을 찾아와 농사를 배우거나 지역사회에 정착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사회적 농장에 자금을 지원했다. 청년이 장애인도 아니고 빈곤층도 아닌데, 이 정책사업이 왜 청년과 관계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그때 제기된 바 있다. 자본도 경험도 없이 귀농하는 청년은 ‘불리한 여건에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고, 사회적 농업의 취지는 농민이 앞장서서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사람을 포용하여 더불어 사는 농촌 지역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므로 사회적 농장이 청년과 함께하는 것을 지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도 그런 입장을 지키고 있다.


  작년의 일이다. 어느 사회적 농장이 정부의 지정을 받으려고 낸 심의 신청서류에 ‘우리 농장은 청년을 대상으로 사회적 농업을 실천하겠다’는 취지의 내용을 넣었다. 이를 본 관계 공무원이 ‘청년이 취약계층 또는 사회적 약자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2018년의 논의를 다시 꺼내어 청년과 함께하는 사회적 농업 실천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 말에 수긍하면서도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사회적 농장에 오는 청년들이 취약계층임을 증빙하는, 즉 소득이 현저하게 적거나 질병이나 장애가 있음을 증빙하는 서류를 첨부하여 신청하게 하자.’라고 제안하였다. 나는 다시 ‘정부가 청년에게 직접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청년이 농장에 찾아와 농사를 배우는 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것인데, 증명 요구가 지나치고 자칫 모욕감이 들지 않겠느냐?’며 반대했다. 결국, 이 논의는 ‘원칙적으로 청년을 상대하는 사회적 농장도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정리되었다. 그런데 요즘 ‘사회적 농업 지원사업의 보조금을 받으려면 청년과 함께하는 실천은 빼야 한다.’라는 헛소문이 돈다.


  행정 체계는 사람에 대한 불신(不信)에 기초해 조직되는 듯하다. 공적 자금을 부정하게 빼먹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방지해야 한다. 감시를 소홀히 하거나 부정수급이 일어날 소지를 남겨두면 담당 공무원은 감사와 문책을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최대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과잉 행정’으로 치닫는다. 분개한 농민이나 농촌 주민은 공무원의 인격을 비난한다. 결국, 보조사업은 책임을 지고 어떤 일을 도모하려는 농민이나 농촌 주민의 부담을 덜어주는 ‘도움’, ‘조력’이라는 원래의 뜻을 잃는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돈을 주니, 행정에서 정한 규칙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게 집행하고 결과를 서식에 맞추어 잘 보고해야 한다.’라는 모멸적인 메시지와 불필요한 행정 업무만 부담으로 남는다. 그리고 민/관 사이에 불신의 장벽이 세워진다.


  농촌 지역사회에는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서로 돕는 정리(情理)가 아직 남아 있어 다행이라고 가끔 생각한다. 물론, 이 정리라는 것은 정실(情實), 즉 사사로운 관계나 정에 이끌려 공정하지 못한 추문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정리에만 의지하여 공적인 일을 도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공적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칼로 두부 자르듯 나누는 것만으로 정책사업이 성공할 수는 없다. 농촌 주민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정책사업을 판관 포청천처럼 엄정하게 집행하더라도 성과를 거두기는 어렵다. 사실, 정리의 길과 합리의 길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외려,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공감하는 정리를 씨줄로, 여러 사람이 관계하는 일에 불공정이 없게 하는 합리를 날줄로 삼아 함께 엮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로운 방도를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서로 경청하고 차분하게 오랜 시간 의사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전글
한반도 할퀸 산불 앞에 소나무는 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