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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논단

농사의 의무통과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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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누리 제 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정신문 기고 | 2025년 2월 16일
김 정 섭(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누구든지 생존하려면 어느 판에든 끼어야 한다. 즉,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조직이나 사물이나 제도와 연결돼야 한다. 고립된 개인으로서는 살아갈 수 없다. 세상 만물은 모두 연결돼 있고, 모두가 서로 의존한다. 연결해야 할 대상은 여럿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반드시 연결돼 거쳐야 하는 대상을 의무통과지점(Obligatory Passage Point)이라고 한다. 변호사나 판사나 검사가 돼 법조계에서 생존하고 싶다면 적어도 세 개의 의무통과지점을 거쳐야 한다.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변호사 시험이다. 재능과 흥미가 있어서 중국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자 할 때에도 거쳐야 하는 통과지점이 여럿이다. 매장, 식재료, 조리도구, 보건소(식품위생법에 따라 영업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세무서(사업자 등록을 해야 한다), 소방서(소방시설 설치 점검을 받아야 한다) 등이다.


의무통과지점의 수나 내용은 변한다. 그런 변화가 있을 때 누군가는 울고 다른 누군가는 웃는다. 중국음식점 경영주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정부가 법률을 제정해 요식업 분야 자영업체가 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을 준수해야 한다고 의무화 정책을 추진한다고 가정해보자. 갖은 규제로 번거로운데 불경기라서 형편도 안 좋은 사장님들은 울상이 될 것이다. HACCP 인증을 받는 과정이 쉽지 않고 돈도 들기 때문이다. 누가 웃게 될지는 생각해 보시라. 물론, 의무통과지점이 늘어난다고 해서 모두에게 항상 안 좋은 건 아니다. 당사자에게는 부담이 되더라도, 다른 모든 이들에게 생기는 이익이 크다면 전체 사회가 감수할 만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사자의 부담과 다른 이들의 이익을 공평하게 견줘 판단해야 하며, 다른 이들의 이익이 커서 의무통과지점을 새로 만들더라도 부담을 느낄 당사자를 배려하는 다른 조치도 병행돼야 한다.


현재 한국 농촌에서 농민이 농사지으며 살아가려면 어떤 의무통과지점을 거쳐야 하는가? 첫째는 농지다. 둘째는 농업경영체 등록제도다. 물론, 농업경영체를 등록하지 않아도 텃밭 정도 수준으로 아주 작게 농사지을 수는 있지만, 살림살이를 유지할 만큼은 되지 못한다. 농업경영체로 인정받지 못하면, 농협 조합원이 되기도 어렵고, 정부의 보조금이나 세제 혜택도 받을 수 없으며, 농지 소유도 불가하다. 셋째는 판로, 즉 시장이다. 현재 한국에서 농민이 접속할 수 있는 시장은 과거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상당한 물량과 일정한 규격을 맞추기 어려운 작은 크기의 농사를 짓는 농민, 특히 고령농은 농산물 시장이라는 의무통과지점과 연결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확실한 의무통과지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대다수 농민이 연결된 중요한 준-의무통과지점으로 농협이 있다. 농협에 빚지지 않고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민은 얼마나 될까?


약 40년 전, 1980년대 중반에는 ‘농사의 의무통과지점’이 지금보다 적었고 단순했다. 농지, 산지수집상·농협·5일장·위탁상인 정도로 나뉘는 단순한 구조의 농산물 시장, 그리고 온갖 정보와 지식과 노동력을 공급해주던 지역사회의 다른 농민들. 이 정도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농사의 의무통과지점’은 늘어났고 복잡해졌다. 농지는 과거에도 쉽지 않은 문제였지만 지금은 더욱 통과하기 어려운 지점이 되었다. 새로이 농업에 진입하려는 사람, 특히 청년은 감당하기 어렵다. 지가(地價)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농산물 시장이라는 의무통과지점은 소농은 통과시켜 주지 않는 장벽으로 기능하기에, 이것을 우회하는 대안적인 시장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농부시장(Farmers’ Market)이니 로컬푸드 직매장이니 꾸러미니 하는 것들을 그런 노력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세력은 미약하고 갈 길은 멀다.


이 글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새롭게 등장한 의무통과지점의 내용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업경영체 등록제도라는 의무통과지점이 ‘정부’라는 의무통과지점으로 확대 변형되고 있다. 예전에도 농민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은 막강했지만, 농사지으려는 농민이 반드시 정부와 연결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직불금,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 등의 납부액 지원금, 농민수당 등 현금 급여에서부터 온갖 투입재 보조금까지 여러 명목으로 자금을 제공하므로 농민이 정부를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규제나 자격 측면에서도 정부가 강력한 권한을 휘두른다. 과연 ‘농사의 의무통과지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부의 지원은 일견 고마운 일이고 더 많으면 좋겠지만, 지원과 함께 통제가 따라온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최근에 벼 재배면적의 대대적 감축을 독려하는 정부의 정책이, 그 성공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독려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규제 권한을 행사하면서 동시에 자금을 지원하는 주체로서의 정부 당국이 강력한 ‘농사의 의무통과지점’이 되고 있다는 씁쓸한 현실이 있다. 정부 정책이나 정부 기구가 농민들을 돕는 방식으로 농사에 관여하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강력한 의무통과지점이 되는 것은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다. 정부가 설치한 지점들을 농민들이 ‘의무적으로 통과하도록 만들어 가는’ 현재의 모습이 농민의 자주성을 제약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정책이란 정부가 의무통과지점을 조정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조정은 신중해야 한다. 의무통과지점의 수를 늘리거나 그 영향력을 키우는 것은 대체로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가 직접 농사짓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질문 하나를 보태자면, 농정 당국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의무통과지점은 왜 별로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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