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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젊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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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정신문 기고 | 2023년 8월 27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랫말이나,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식의 책 제목을 나는 반기지 않는다. 오히려 ‘오직 사람만이 절망’이라던 어느 철학자의 글귀에 공감한다. 섣불리 ‘희망’을 입에 올리는 건, 엄중한 현실을 모르는 자의 유치한 낭만이거나, 발본적인 비판의 칼날을 무디게 만드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리라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절망이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수상쩍고 위험한 젊은이들이 꽉 막힌 농업·농촌의 현실을 어긋내며 탈출로를 만들어 온 내력을 되짚어보면 알 수 있다.


50여년 전, 충남 홍성군에서 젊은 농민 몇 명이 뜻을 모았다. 농사짓는 몸이 곯고 땅도 상하는 그런 농사는 짓지 말자고 했다. 농약 쓰지 말고 공장에서 만든 금비(金肥) 대신 퇴비를 직접 만들어 쓰는 유기농을 하자고 했다. 온 나라가 식량 증산에 여념이 없는데,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가는 짓이라는 타박을 곁들인 외면을 만났다. ‘빨갱이’라며 근거 없이 헐뜯는 사람도 있었다. 유기농업을 시작한 청년 농민들이 초로(初老)에 접어들 무렵, 그 뒤를 이어 나타난 다른 청년 농민이 논에다 새끼 오리를 풀어 넣은 게 1990년대의 일이다. 이 무슨 해괴한 농사냐는 의문이 소문이 됐고, 소문은 현실이 됐다. 이것이 오리농법의 시작이다. 한국 유기농업 역사에서 결정적인 한 계기였다.


팜스테이(farmstay)가 경기도 포천시에서 처음 시작된 게 얼추 30년 전이다. 도시 손님이 호텔에서 자고 명승지를 유람하고 유명한 음식점에서 미식(美食)을 맛보는 관광이 아니라, 농가에 머물며 농사를 직간접으로 경험하고 농민과 이야기 나눌 기회를 만들자는 뜻이었다. 도시민에게는 유의미한 경험이 되고 농가에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리라며 팜스테이를 시작한 젊은 농민에게 냉소가 쏟아졌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건, 이 젊은 농민이 1980년대 초중반 최고 권력자의 친형님이 주도하고 정부가 그 배경이 된 ‘소값파동’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 소 사육에 처절하게 실패한 후, 궁여지책으로 앞마당에 한가득 핀 봉숭아꽃을 빻아 서울의 모 여자대학교 앞에 나아가 팔기도 했다. 이 수상한 판매 행각은 농업이 농산물만 생산하는 활동이 아니라 ‘다른 서비스’도 제공하는 활동이 될 수 있다는 각성으로 이어졌다. 한국 농업관광의 효시(曉示)라 할 만하다.


2000년대 초반, 농민이 소비자에게 먹거리를 직접 판매하면서 교류하는 농민시장(Farmers market), 로컬푸드 직매장, 꾸러미, 공동체지원농업(CSA) 등 ‘얼굴 있는 먹거리 시장’을 만드는 실천이 한국에도 소개됐다. 그런 실천의 필요성과 정책 관심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한 줌도 안 되는 좌파 소농들의 헛생각’이라는 경멸 섞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검질기게 노력한 끝에, 지금은 시중의 갑남을녀도 ‘로컬푸드’라는 말을 모르지 않는다.


이렇게 조금만 소개한 ‘젊은이’들은 사망했거나 노인이 됐다. 그렇지만 여전히 수상한 젊은이들이 어느 곳에선가 일하며 궁리하며 실험하고 있을 테다. 누군가는 토종 씨앗을 염려한다. 누군가는 장애인, 아동, 노인과 더불어 농사지으며 살길을 찾는다. 또 다른, 지면(紙面)이 작아 소개하지 못하는, 내가 모르는 참신한 궁리와 실험들이 곳곳에서 싹을 틔우고 있으리라. 머지않아 민들레 꽃씨처럼 흩날려 방방곡곡에 퍼지리라. 이들은 지도에 나온 항로를 따라 항해하지 않는다. 망망대해를 위험하게 표류하는 중이다. 본디 바다에는 정해진 항로가 없다. 지도는 ‘위험한 젊은이들’이 갖은 곡절을 겪으며 탐험한 결과, 사후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지도를 따라가지 않고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의 생물학적 나이와는 무관하게, 모두가 위험한 젊은이다. 농촌에는 위험한 젊은이가 필요하다. 이들의 수상한 행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아니면 스스로 위험한 젊은이가 되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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