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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과잉시대의 출구찾기, 사람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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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박준기

한국일보 기고 | 2023년 5월 5일
박 준 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어린 시절 내 경험 속 쌀은 식량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물량이 부족했기에 재화로는 우등재였고, 희소성이 높아 화폐의 기능도 했다. 그런 쌀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농업인들의 삶은 눈물겨웠다. 다랭이논, 삿갓논, 구들장논은 그 이름만으로 아픔과 수고로움이 느껴진다. 산골짜기 비탈진 곳에 계단식으로 좁게 만든 논이 다랭이논이다. 다랭이논 중 일부는 삿갓을 덮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서 삿갓논이라 불렸고, 구들장논은 온돌처럼 구들장을 놓아 계단을 만들어 관개·배수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쌀 생산의 수고도 만만치 않았다. 농기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 조상들은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모내기를 했다. 무더위 속에서 잡초를 뽑아야 했고, 다시 허리를 구부려서 가을걷이를 했다. 지금은 평균 영농규모 1.5㏊가 영세하다고 하지만, 농기계가 부족했던 시절에 20마지기 이상의 논에서 벼를 재배하려면 온 동네 사람들이 참여하는 품앗이가 불가피했다.


쌀이 귀했던 시절, 농촌 금융은 쌀 본위제였다. 인플레이션이 심할 때 화폐로 금융거래를 하면 상환 시점에서 빌려주는 쪽이 손해다. 그래서 현물인 쌀이 금융거래의 기준이 되었다. 쌀 한 가마니 값을 기준으로 돈을 빌리고, 갚을 때는 가격이 오른 쌀 한 가마니 값에 이자를 더해서 돌려주는 방식이었다.


물량 부족을 넘어서 희소하기까지 했던 쌀을 자급하게 된 것은 농업인은 물론, 국민 모두의 참여로 이루어낸 성과다. 농업생산기반정비사업을 실시해 농지와 농업용수 등 자원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였다. 간척사업을 하여 농지를 확보했고, 논농업의 기계화율도 2020년 98.6%에 이르렀다. 쌀시장 개방 영향을 최소화한 것도 국민의 지지로 가능했다.


최근엔 쌀의 공급과잉을 우려하게 되었다. 쌀 생산량은 최근 10년 동안 연평균 0.4%씩 감소했고, 소비량이 연평균 2%씩 줄어 나타난 결과다. 부족했던 쌀이 이제는 남아서 문제다. 쌀 부족 문제를 극복했던 지혜를 다시 발휘해야 할 시점이다.


그동안 쌀 수급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사람 문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2021년 기준 103만 농가 중 70세 이상이 42.7%이며, 쌀 농가는 이보다 높은 49.5%이다. 쌀 농가 중 경지면적이 0.5㏊ 미만 농가 비중은 53%로 과반이 영세농이다. 쌀이 부족했던 시절을 이겨내기 위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던 세대가 이제 고령이 되었고, 다수가 영세하다. 고령농가들은 경제적 부담과 불안정한 노후 생활 우려로 농업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다. 자산 규모, 소득 수준, 농업 활동 등의 측면에서 고령농가는 성격이 다양하다. 그러나 대표적 은퇴 지원제도인 경영이양직불제와 농지연금제도는 농지 규모와 연계되어 있다. 이로 인해 평생 영농을 했어도 농지 규모가 작거나 임차농이면 농업을 내려놓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쌀 부족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이제 고령이 된 농가들이 명예롭고 안정된 노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인 지원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쌀을 상품으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젊은 세대에게 농지를 이양해 농업이 활력을 되찾고, 국민 지지로 이뤄낸 쌀 자급 성과가 훼손되지 않도록 고령농을 위한 합리적인 지원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시장은 상품을 보지만, 정책은 사람을 우선하여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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