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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농정개혁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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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임송수
KREI 논단| 2007년 11월 8일
임 송 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미국은 1930년대 초반부터 농업에 보조하기 시작하였다. 농산물이 과잉 공급되어 가격이 하락하자 가족농을 보호하고 농산물 가격지지를 통하여 농가소득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조는 생산을 부추기는 효과가 있으므로 재배면적 할당이나 휴경과 같은 공급통제조치가 함께 도입되었다. 공급 초과 상태에서 더 많은 생산을 장려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은 1960년대에 공동농업정책(CAP)을 태동시켰다. 미국의 경우와 반대로 CAP은 식량안보를 확충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식량 자급률을 높이려고 보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대 들어 EU는 식량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모하였다. 이때부터 과잉생산과 싸움이 농정의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생산을 줄이려고 우유 쿼터제도가 도입되었고 휴경제도도 시행되었다(이 조치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또한, 잉여 농산물을 세계시장으로 밀어내려고 수출에 보조하면서 미국과 EU 간 보조금 전쟁시대가 열렸다. 세계 농산물 시장에서 최대 수출국이 되기 위한 미국과 EU의 각축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식량수입국들은 환호를 보냈다. 선진국의 수출보조 덕택에 싼 가격에 식량을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원조도 늘었다. 공짜로 들어오는 식량을 주식으로 바꾼 나라도 생겼다. 그러나 정말 ‘공짜’는 없었다. 싸게 들어오는 식량이 자국 농업과 농촌을 위기에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농민들은 식량원조용 옥수수를 가득 실은 트럭에 밀려 농지와 농촌을 떠나야 했다.

 

이때 세계무역기구(WTO)가 나섰다. 우루과이 라운드(UR)는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 규범 안에 농업을 포함시켜 무역과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농업보조를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미국과 EU는 큰 폭은 아니지만 가격보조와 수출보조를 줄여야 했다. 그러나 생산통제 조치를 전제로 시행하는 직접지불은 ‘블루박스’란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생산이나 가격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는 직접지불은 ‘그린박스’로 분류하여 감축의무에서 면제시켰다. 환경보조, 농촌개발보조, 재해지원, 생산과 무관한 소득 직접지불 등이 그린박스이다.

 

UR 협상 중이던 1992년에 EU는 가격보조를 낮추면서 이를 보상하는 직접지불(블루박스)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것이 농정개혁의 시발점이다. 1999년에는 가격보조를 더 낮추고 직접지불을 확충하였다. 직접지불 1달러가 0.75 달러의 농가소득을 창출하는 반면에 1달러의 가격보조는 0.35 달러의 소득으로밖에 연결되지 않는다는 OECD 연구를 믿었던 것일까? 하여튼 2003년에도 계속된 EU의 농정개혁은 한걸음 더 나아가 품목별 직접지불을 농가 단위 직접지불로 발전시켰다.  

 

미국도 농정개혁을 시도한 적이 있다. 농산물 가격이 올라 가격보조의 역할이 줄어들자 1996년부터 7년간 직접지불을 줄이고 시장신호에 충실한 농업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2년 만에 깨졌다. 1998년 들어 국제 곡물가격이 급락하자 엄청난 규모의 긴급보조가 투입된 것이다. 이어 그 어느 때보다 농업보조 규모를 늘렸던 2002년 농업법은  국제사회로부터 거꾸로 가는 농정개혁이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지금 미국 의회가 논의하는 2008년 농업법도 농정개혁과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혹자는 지금까지 미국 농정에는 패러다임 전환이 없었다고.

 

2001년부터 진행 중인 WTO 도하개발의제(DDA) 협상은 2013년까지 선진국의 수출보조를 완전히 철폐하기로 결정했다. 가격보조도 더 감축하고 직접지불에 대한 규율도 강화할 것이다. 또한, DDA는 블루박스에 처음으로 상한을 설정하고 그린박스도 명실상부하게 생산과 연계되지 않는 직접지불이 되도록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두 가지를 떠올려 본다. 먼저 세계 농정개혁의 흐름 속에 한국은 누구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 농정의 변화는 EU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생산 중심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다원적 기능 중심으로 농정이 변하고 있다. 쌀 수매제 폐지와 소득보전 직불제 도입, 환경보전과 농촌개발지원, 경관보조, 식품안전조치 등이 그것이다.

 

둘째는 농정개혁이 어느 종착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2005년에 영국은 농가 소득지원 직접지불을 폐지하고 농촌개발 보조만을 운용해야 한다는 비전 보고서를 내놓았다가 홍역을 치른 바 있다. 과연 이것이 미래의 농정 방향일까? 선진국 농촌에서 농업은 더 이상 최대 산업이 아니다. 그래서 농촌경제를 살리려면 농업과 농민에 국한된 정책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와 연계된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 불완전한 시장기능 곧 시장실패를 치유하는 데서 농정의 정당성을 찾듯이, 농정개혁의 완성은 농업부문만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과 품질의 공공재를 안정되게 공급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농정이 그 길을 달리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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