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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모원려의 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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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정 기고 | 2024년 2월 11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멀리까지 내다보고 깊게 생각하는 것과 흐린 정신으로 가볍게 움직이는 것, 두 종류의 태도가 있다. 자녀에게 심모원려(深謀遠慮)와 경거망동(輕擧妄動) 중 무엇을 가르쳐야 하냐고 부모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심모원려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가르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아파트나 주식의 가격 상승과 하락에 일희일비하고, 플랫폼에 막 도착한 출근길 전차를 놓치지 않으려 달음박질치고, 어느 학원 선생이 요령 있게 가르치더라는 동네 엄마들 단톡방 정보를 확인하느라 발품 파는 게 대도시 학부모의 삶이다. 멀리 보고 깊게 생각하고 싶어도, 내 생활의 문법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삶에서는 ‘심모원려의 태도를 가르치겠다고 심모원려하는 교육’이 나올 리 없다. 그렇게 된 게 부모 탓만은 아니다. 경거망동의 문법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기입된 일종의 문화여서 한국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흔하게 드러난다.


경거망동의 문법은 농업·농촌 정책에서도 ‘쏠림 현상’으로 나타난다. 불과 1~2년 사이에 전국의 수많은 상점가에 탕후루 가게가 생겨나지 않은 곳이 없듯, 이른바 ‘키워드’ 하나가 뜨면 거기에 맞춘 정책 사업이 순식간에 전국 지방자치단체로 퍼진다. 과자 봉지에 금박으로 새겨넣은 ‘캐릭터 키워드’로 아이들 코 묻은 돈을 쓸어 가려는 기업을 흉내 낸 정책이 입안된다. ‘키워드’가 외국말(정확하게는 영어)이면 ‘마케팅’에 더 좋다. 왠지 ‘스마트’하거나 ‘힙’하게 보일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정책이 십 년이나 삼십 년 뒤 농업·농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냐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이러스처럼 온 천지에 퍼진 경거망동의 문법을 비판적으로 살펴봐야 할 때다. 빠르게, 크게, 눈에 띄도록 요란하게,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게, 경쟁에서 이기도록, 멈추지 말고 계속 성장하는 것만 추구하는 문법 말이다. 이것은 ‘비즈니스’ 세계의 문법이다. 신상품을 빨리빨리 개발하고, 요란하게 판촉해서, 소비자 눈에 띄고, 시장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고 회사원을 압박하는 주식회사 CEO의 문법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이나 관료나 정책 연구자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다. 농업·농촌 정책은 상품이 아니다. 농민이나 농촌 주민이나 국민은 소비자가 아니다. 또 상품은 소비자가 구매해 사용하면 곧바로 시장에서 평가가 이뤄진다. 하지만 정책은 그렇지 않다.


정책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지금 우리가 아니라 다음 세대들이다. 중요한 정책일수록 그 결과가 나중에 드러난다. 지금 중요한 농정을 입안하는 사람은 그 결과를 못 보고 죽을 수도 있다. 임가(林家)의 늙은 아버지는 내년에 팔아먹자고 묘목을 식재하는 게 아니다. 자식, 손자 등 후세를 생각하며 나무를 심는다. 농정은 그런 것이고, 그런 것이어야 한다. 작게는 농촌 지역사회의, 크게는 국가의 먼 훗날 세대가 향유하고 다시 그 후손에게 물려줄 무엇을 유지하고 보전하려는 일종의 ‘공동체적 기획’이다. 심모원려 없이는 농정을 기획해서도, 실행해서도 안 된다.


농정을 고민하는 이들은 무엇을 멀리까지 내다보고 깊게 생각해야 할까? 장기적으로 그 수나 양이 줄어들 것들을 깊게 살펴야 한다. 앞으로 감소할 것은 농지와 농촌의 인구다. 이미 저출생·초고령 사회가 된 농촌의 인구를 반전(反轉)시킬 가능성은 없다. 실은, 국가 전체의 상황이 그렇다. 경제성장률이 거의 제자리에 머무는 정상경제(定常經濟)의 국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성장을 당연하게 전제한 기획은 모조리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농업소득의 지속적 상승(그렇게 된 적도 없지만) 대신에 어려운 여건에서도 농지와 농민을 보호해 농사를 지속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경제는 성장하지 않아도 사람은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줄어든 농촌에서 농사를 포함해 환경관리, 돌봄, 교육, 보건의료 등 꼭 필요한 활동을 유지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런 농정은 공세가 아니라 방어 또는 후퇴의 전략일 것이다.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커스 막간에 공 몇 개 들고나와 양손으로 쉴 새 없이 던지고 받는 광대의 저글링(juggling) 같은 농정으로는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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