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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견딜만 하다면 오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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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0년 3월 6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농촌이 지닌 가치를 화폐 단위로 환산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야말로 귀중하다는 것쯤은 쉽게 직감할 수 있다. 그런 종류의 소중함은 말과 글로써, 즉 인문학적 언술을 통해서나 그 일부분이 겨우 드러난다. 농촌을 두고서는 이런 말을 보태고 싶다. “소비 중독에 빠진 도시 문화를 치유할 해독제는 농촌에 있다.” 틈만 나면 발설하는 지론이지만, 허공에 뜬 소리로 들릴 듯하다. 해명이 필요하리라.


30년 전만 해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일곱 글자를 심심치않게 볼 수 있었다. 농과대학 건물 외벽에 붙은 대자보에서, 가을철 농사일로 바쁜 시절을 보도하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농민들의 군중 집회에서.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국민총생산에서 농업생산액이 차지하는 비중도 낮아지고 농가 인구 또는 농촌 인구의 비율도 줄어서, 즉 농자(農者)가 사회의 소수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그럴 듯하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도 조명해볼 수 있다. 과거에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소비 행위가 아니라 노동 행위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정체성은 ‘무엇을 구매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생산하는가’에 따라 형성되었다. 그래서 ‘농자천하지대본’일 수 있었다. 농민은 인간 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소중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노동이 아니라 소비가 일차적인 사회 활동으로 간주되는 완연한 소비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간다. 사회의 근본인 생산자보다 소비자가 더 높다. 소비자는 왕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소비에 더 강박적이고 집착하게 된다. 중독된다.


“쇼핑을 마친 후 백화점 문을 열자마자 찬바람이 그녀의 뺨을 매섭게 할퀴고 지나갑니다. 손에 들린 쇼핑백도 날아갈 듯이 요동칩니다. 쇼핑백에는 점원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구매한 핸드백과 구두가 들어 있습니다. …(중략)… 경쾌했던 그녀의 걸음은 지나가는 인파에 부딪히며 조금씩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또다시 돈 쓸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중략)… 그래도 오늘 산 물건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다짐이라도 하듯 그녀는 쇼핑백을 재차 들여다봅니다.”(강신주, 《상처받지 않을 권리》).


이처럼 소비 중독에 빠진 사회에서는 결국,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사용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어 내도 높은 수익이 따르지 않는 노동은 사회적으로 열등한 자리로 자리매김”된다(우치다 타츠루, 《어른 없는 사회》). 농민의 처지가 그러하다.


촉수가 예민한 어떤 도시민들은 중독자의 전형적인 증상인 무감각에서 깨어나 탈출을 시도한다. 그리고는 뭔가 새로운 것, 소비가 아닌 다른 것을 찾아 농촌을 찾는다. 문제는 소비 문화의 중독성은 뜻밖에도 강력해서 사람의 내면에서 쉽게 탈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시를 떠나 농촌에 당도해서도, 사물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사람을 서비스업 종사자로만 바라보는 데 익숙해진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아니, 농촌에서 경험하리라 예상하는 그 모든 사건을 ‘새로운 문화상품’쯤으로나 여기는 듯하다. 그리하여 농촌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노동의 장소이자 호혜적 관계가 여전히 작동하는 공동체의 장소라는 사실이 은폐된다.


대신에 농촌의 풍경은 볼거리, 먹을거리, 체험거리 따위가 진열된 소비의 ‘대상’으로 돋을새김된다. 간혹, 어떤 학생들은 농촌에 소비하러 오는 게 아니라 봉사하러 온다고도 하지만, 농민이나 농촌 주민을 봉사의 ‘대상’으로나 여긴다는 점에서, 소비자 마인드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래서 여섯 살 어린이도 5,000원을 내야 고사리손으로 고구마를 캐어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갈 수 있다며 ‘가성비’를 셈하기에 이르렀다. 대도시 생협의 소비자 조합원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정월대보름 교류 행사를 하겠다는데, 실상은 ‘고기를 구워달라’, ‘쥐불놀이를 할 수 있게 해달라’, ‘달집태우기를 연출해 달라’ 등등 온갖 서비스를 요구하기 일쑤다. 중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며칠 머물며 봉사활동을 하겠다는데, 또는 대학생들이 방학 때 농촌봉사활동을 하러 오겠다는데, 기실은 농촌의 어르신들이 ‘봉사 받는 봉사’를 해야 할 판이다.


물론,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탓을 ‘소비 중독의 도시 문화’에만 돌릴 수는 없다. 진정성, 연대, 소통, 대화, 예상치 못한 만남이 주는 설렘 등을 선사하던 도시-농촌 사이의 교류 활동을 고작 ‘관광 상품 및 서비스 거래’ 따위로 변질시킨 관련자들의 탓도 크다. 정책 당국과 전문가 행세하는 학자들과 컨설턴트와 일부 농업인들도 ‘사람살이의 무늬[人紋]’(김영민, 《동무론》)를 켜켜이 간직한 농촌의 의미를 왜곡하는 데 일조했다.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한들 어디에 쓰랴. 앞으로가 중요하지. 찾아오는 도시민을 맞이하는 농민 스스로가 주인으로서 객을 품위있게 맞이해야 할 테다. 그리고 도시민들에게는, 외람되지만 어느 시인의 노랫말(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흉내 내어, 이렇게 권하고 싶다.


행여 시골에 오시려거든, 오곡 풍성하게 익어가는 가을 넉넉한 나눔과 인심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봄철 신록과 화사한 꽃그늘에 쉬려거든, 행락객의 흑심을 품지 않은 맑은 눈으로 오시라. 겨울철 눈 쌓인 들판 달빛을 받으려면, 욕망에 찌든 생활을 털어 버리고 서늘한 마음으로 오시라. 그래도 농촌에 와서 일하고 싶다면 작렬하는 여름 태양 아래 온 몸 불사르는 노동의 이름으로 오고, 진실로 진실로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면 강변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오랜 세월 갖은 풍상에도 꿋꿋하게 버텨 선 마을 초입 정자나무를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농촌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농촌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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