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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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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경제 시대, 혁신과 창의가 흘러넘치는 농업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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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채승병
농경나눔터 농정시선 | 2013년 5월호
채  승  병(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창조경제, 진정 새로운 흐름인가

 

  새로운 정부 출범과 함께 우리의 경제사회 전 부문에서 '창조경제'를 규정짓기 위한 움직임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밑바닥의 의견을 듣노라면 가슴 벅찬 희망보다는 볼멘 푸념과 비관도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된다.

 

  이미 이동통신과 인터넷의 보급을 통해 정보화의 물결이 밀어닥친 1990년대 후반부터 IT(Information Technology;정보통신기술) 기술이 접목된 장밋빛 농업의 미래에 대해 수많은 전망이 쏟아졌다. 지구온난화와 자원부족 시대를 맞아 국내 농업도 취약산업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를 위해 농업도 BT(Bio Technology;생명공학기술), IT 등 새로운 과학기술을 융·복합시켜 안전하고 건강한 참살이(well-being)의 기반으로 도약하자는 비전도 선포되었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농어민 대상의 정보화교육, 영농정보서비스 도입,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통한 효율성 제고 사업도 시도되어 왔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이러한 사업들이 나름의 성과는 분명 있었으나,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는 데까지는 다소 미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창조경제 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과연 농업에 달리 새로운 변화가 있겠느냐는 우려가 나올 법도 하다. 그렇다면 창조경제는 정말로 헌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그런 것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가 과연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창조농업, 이제는 때가 무르익고 있다

 

  『손자병법』 가운데서도 맨 앞을 차지하는 '계편(計篇)'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그러므로 다섯가지로 헤아리고, 헤아려 볼 것으로 비교해서 승부의 정세를 탐색할 수 있으니, 첫째는 통치의 도, 둘째는 천시, 셋째는 지리, 넷째는 장수, 다섯째는 군법이다(故經之以五, 校之以計, 而索其情: 一曰道, 二曰天, 三曰地, 四曰將, 五曰法.)." 이 말은 전쟁은 물론 비즈니스 등 세상의 일이란 적절한 명분과 실력을 쌓는 것(道) 이외에도, 시기(天)와 환경(地), 리더십(將), 조직력(法)이 두루 맞아야 이뤄진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이는 농업혁신에 있어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이제껏 수많은 노력에도 농업 현장에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아직도 우리의 개별 영농단위는 규모나 수익성 면에서 너무 작아 아무리 좋은 기술이 있다 해도 여기에 투자할 여력이 부족하다. 신기술 도입을 위해 금융지원을 해봤자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부채로 쌓이는 일이 반복되어 온 것도 문제였다. 꼭 돈이 아니더라도 농촌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고령자들이 IT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은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을 거리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대다수에게 여전히 ERP 시스템 등 다양한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정보통신기술) 솔루션은 '그림의 떡'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13년 우리에게는 유의미한 환경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최근 ICT 업계에 몰아닥치고 있는 PC의 쇠퇴와 새로운 스마트 디바이스의 진화,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기술의 인기는 결코 먼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에는 ICT 솔루션을 도입하기 위해서 비싼 시스템을 구입하고 별도의 관리자까지 고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모든 내용들이 클라우드 기반 서비스를 통해 매우 저렴하게 제공된다. 스마트 디바이스는 매우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통해 PC 수준의 노력 없이도 쉽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저렴한 센서 모듈과 스마트 디바이스를 결합하면 다양한 데이터의 수집과 전송에 드는 수고도 크게 줄일 수 있다.

 

  농업만을 위해 이러한 디바이스와 서비스 플랫폼이 출현했다면 이제껏 그래왔듯 고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단가를 낮출 수 있는 범용기술들이 발전하여 농업에도 적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이 이뤄지고 있으므로 시장성이 확보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대형 서비스 기업들이 이러한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한국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일본에서는 NEC, 후지쯔, IBM, NTT 등 유수의 기업들이 타 산업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농업 서비스에도 적극 투자하고 있다. 일본IBM은 농산물 이력추적 서비스를, NEC는 'Connexive'라는 M2M 기반 생육환경 감시 및 물류 서비스를, 후지쯔는 '아키사이(秋彩)'라는 농업관리 클라우드 서비스 등을 내놓고 있다. 이는 농업 분야도 시장의 호응을 얻어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로 발전시키기 위한 환경이 빠르게 성숙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농업에 새로운 창조의 물꼬를 트자

 

  이러한 천시와 지리의 성숙은 허투루 넘길 것이 아니다. 그동안 꿈꿔 오고 조금씩 준비해 오던 미래가 이제는 정말로 현실화될 수 있는 호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마트 환경에 익숙하면서도, 도시의 각박한 생활에 지쳐 농촌에서 새로운 삶을 가꿔보려는 청장년 인력들이 늘어가고 있다. 정부는 이럴 때일수록 한국의 강력한 ICT 기업들이 농업 현장으로 다양한 플랫폼을 확대하도록 유도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무장한 이들이 그 위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새로운 농업 서비스 기업이나 영농기업을 창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더군다나 한국의 농업현실은 공익성이 유난히 강조되고 있는 만큼, 정부가 변화에 대한 이해관계자들의 우려를 적시에 불식시켜 나가는 조정자의 역할을 정확히 수행해야할 것이다.

 

  스티븐 존슨의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원제: Where Good Ideas Come From)』를 보면 '번쩍'할만한 창의성은 각자의 두뇌에서 오랜 시간 숙성되며 형성된 '느린 예감(slow hunch)'이 서로 충돌하고, 교환되고, 뒤섞이는 과정에서 생겨난다고 한 바 있다. 우리의 농업 현장에 이러한 느린 예감은 이미 충분하다. 이제는 농부가 풋과일을 익힐 때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맞춰주고 에틸렌과 같은 약품에 노출시키듯이, 농업현장을 항상 다양한 협업과 아이디어의 교류가 일어날 수 있는 후숙(後熟)의 공간으로 가꾸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영혼을 울리는 수많은 교향곡과 협주곡이 때로는 느린 안단테 선율과 함께 애잔한 기품을 주다가 경쾌한 비바체로 넘어가 생기를 불어넣어 주듯이, 우리의 농업도 이제는 느린 예감을 엮어 역동성이 넘치는 창의의 물결을 만들어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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