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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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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네 사람들의 술집 개업을 뒤늦게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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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KREI 논단| 2012년 09월 18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

 

요즘에는 어느 시골에서 폐교 위기에 처한 초등학교를 지키려고 주민들이 장학기금도 모으고 탄원서도 제출했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농촌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걱정해야 할 대상은 학교뿐만이 아니다. 병원, 약국, 소매점, 음식점, 목욕탕, 철물점, 농기계수리점 등등. 그리고 술집이 있다. 한가롭게 시골 동네 술집 걱정까지 하냐고 핀잔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잠깐 한번 생각해보시라.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들일을 마친 한동네 사람들이 어쩌다 만나 술 한 잔, 가족 이야기, 마을 이야기를 나눌 장소조차 없다면 그곳을 ‘지역사회’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인구 3,000명 남짓한 그 동네 면사무소가 있는 읍내 상권을 이루는 것은 농협, 신협, 약국, 추어탕집, 슈퍼마켓이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한 소매점, 문 닫은 새벽에는 탁자 위로 쥐라도 몇 마리 활개치고 다닐 것 같은 허름한 술집이 전부였다. 사건은 그 술집 주인장이 단골손님이자 술벗인 ‘동네 술꾼’ 몇 명에게 더 이상 가게를 운영하기 어렵겠다는 고백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동네 술꾼’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이곳이 문을 닫으면 우리는 어디에서 만나 술을 마시나?”라는 걱정이었다. 절박한(?) 필요가 해결책을 낳기도 한다.

 

  그들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술집을 지키기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기로 했다. 지역사회 곳곳에 알려 취지를 설명하고 조합원을 모았다. 현금 출자가 어려운 이는 노동으로 출자하였다. 그렇게 해서 가게를 임차하고 실내를 리모델링하여, 조합원 130명으로 구성된 ‘마을까페 뜰’을 개업하였다. 조합원들이 거의 모두 생업에 바쁜 농민들이어서 농번기에는 저녁 7시 반이 지나야 문을 연다. 상근 직원을 고용할 여유가 없어 당번을 정해 주방 일과 서빙을 한다. 개업 후 반년이 지났다. 주당들만 출입하는 술집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손쉽게 모이는 ‘사랑방’ 같은 곳이 되었다. 어차피 술을 팔아서 큰돈을 벌려고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작은 시골에서 술집을 열어 많은 수익을 낼 수도 없거니와, 그런 의도였다면 협동조합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자를 안보고 저렴한 가격으로 동네에서 유일하게 맥주도 마실 수 있는 사랑방 역할을 하면 된다. 이 ‘협동조합 술집’은 앞으로 그 동네에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올해 12월이면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다. 이 법의 핵심 내용은 ‘5인 이상이 모이면 출자금 하한 없이 손쉽게 거의 모든 업종에서 협동조합 법인을 설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대한 제도 변화이다. 특히, 농촌 지역사회 발전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개연성 있는 상상’과 ‘끊임없는 실천’을 요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농촌 지역사회에서 협동조합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온전히 영리만을 추구하는 상업 경영체를 통해서는 공급되기 어려운 재화나 서비스를 협동조합이 제공할 수 있다. 이윤 축적이 최우선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농촌에서 유지되기 어려운 목욕탕, 대중교통, 약국, 병의원, 도서관, 소매점, 식당, 어린이집 등등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유지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술집을 만든 곳도 있지 않은가?

 

  한편, 협동조합은 지역사회 구성원의 결속과 ‘사회 자본(social capital)’을 증진시킨다. ‘협동조합 원칙의 마지막 조항(지역사회에의 기여)’에 충실하게 운영되는 협동조합은 지역사회의 사회적?경제적 허브(hub)로 자리 잡을 것이다. 주민들 스스로 일상생활에서 실천한 경제적?사회적 협동은 ‘지역사회’를 구체적인 상호작용과 신뢰의 그물망이라고 깨닫는 경험으로 변환된다. 그것은 다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또 다른 기획을 추진할 동력이 된다. 협동조합은 지역사회의 '인적 자본(human capital)'을 증진시키기도 한다. 협동조합을 창립하고 경영하면서 리더십, 경영능력, 민주적 의사결정 능력이 배양된다. 협동조합 원칙의 다섯 째 조항이 규정하는 조합원 교육과 협동조합 운영의 경험은 그 협동조합이 있는 지역사회의 인적 자원을 개발하는 과정으로 기능한다.

  

  협동조합 운동은 농촌 발전 정책이 지난 10년여 동안 추구했던 ‘내생적 발전’ 전략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자조(自助), 민주주의, 자치, 역량 강화 등의 핵심어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협동조합기본법’이 내생적 농촌 발전 전략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중요한 제도적 기초가 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적 환경이 우호적으로 바뀐 것 그 자체가 농촌 지역사회 발전의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제도는 제도일 뿐이며, 협동조합이라는 형식 그 자체가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잠자고 있는 협동의 DNA(디엔에이)가 활성화될 때까지, 현장의 자발적 결사와 부단한 실천 경험을 켜켜이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거기에 공공 부문과 시민사회의 여러 주체들이 적절하게 조력(助力)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시급하게는 협동조합이 무엇인지, 협동조합이 농촌 지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협동조합을 어떻게 설립하고 경영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정보 제공, 교육, 학습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펼칠 전략과 수단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 멀게는 반세기에 걸친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경험하면서 사회의 각 부문과 개인의 내면에 깊이 각인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성찰하고 ‘협동’과 ‘자치’의 문화를 뿌리내릴 원대한 구상을 공유하고 논의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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