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목록

KREI 논단

KREI 논단 상세보기 - 제목, 기고자, 내용, 파일, 게시일 정보 제공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숙제
1994
기고자 손재범
농경나눔터 농정포커스 | 2010년 3월호
손 재 범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제도는 당면한 현실을 반영한다. 시대가 변하는데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제도는 이미 낡은 것이다. 낡음을 인지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요구하며, 새로운 제도는 낡음을 대체하게 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필연이다.

2010년 농협중앙회는 경제사업과 신용사업을 겸영하는 종합농협 50년을 맞는다. 농협은 악명 높은 고리대를 끊고 농촌경제를 안정시켰고 도시 자금을 끌어들여 농촌을 지원했다. 증산을 독려하고, 비료 등 농자재와 영농자금을 공급하고 농민이 생산한 쌀을 수매해줬다. 가히 농협은 어려운 농업과 농민을 위해 많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도는 안착했을 때 새로운 모순을 안게 된다. 농민의 어려움을 달래 주고, 국민들의 배고픔을 잊게 해 준 약(藥)으로서 농협은 역설적이게도 그 역사적 소명에 한계를 보여 준 9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채 농업발전에 발목을 잡는 독(毒)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날로 진화하는 농산물 시장

90년대 중반 이후 농산물 시장은 국제시장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수입농산물과 경쟁해야 하는데 농산물이 농협을 경유하는 데 그치는 것은 한계일 수밖에 없다. 대형유통업체, 직거래, 인터넷 등 새로운 업태가 생겨나고 이들의 힘이 커지면서 조직화에 무대책이었던 산지는 처절하게 소비지에서 깨지게 된다. 정부 정책은 직접 수매하고 가격을 지지하던 것에서 시장을 통한 수급조절로 전환했다.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고 정부는 이를 보완하고자 직불제를 도입했다. 생산자가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시설 현대화, 운영 활성화, 상품화를 위한 지원으로 정책을 변화시켰다.  

이런 변화에 가장 큰 생산자조직인 농협이 적절하게 대응해왔나? 농민조합원이 ‘선량한 대리인’으로 기대한 만큼 농협 임직원이 제 역할을 했나? 결론적으로 농협은 빠른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고 대응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농민조합원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농협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인가?

 

농협이 뛰어넘어야 할 한계

우선, 농협은 경제사업을 환원사업이자 적자사업으로 인식하는 구조를 깨트리지 못했다. 농협 경영자는 신용사업에 의존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고 차기까지 약속받고 싶어했다. 힘들게 경제사업을 하는 것보다 도시와 지역에 점포를 늘려서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조합과 중앙회 유지에 빠르고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조합원은 어려움을 겪지만 농협 경영은 여전히 튼튼하고 이와 관련된 임직원은 잘 살고 있다. 결국 농민조합원 이익에 조합이 복무한 것이 아니라 조합과 중앙회 이익에 농민조합원이 희생된 것이다. 이런 구조를 깨서 각각 사업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개선점이 제대로 도출되고 발전에 집중할 수 있다.

둘째, 농협은 다양한 농민조합원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는 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 은퇴할 정도의 연로한 조합원들은 환원사업이나 복지사업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반면에 농사 소득이 많은 조합원은 농산물을 제 값에 팔아주기를 바란다. 품목별로도 다양한 요구가 있다. 쌀 생산농가는 과수 농가를 위해 조합이 산지유통센터에 투자하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요구를 읍면단위에서 해결하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한다. 합병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안고 규모만 커지기 때문이다. 읍면단위가 판매하는 물량을 시군, 도, 전국단위로 보내야 해결될 수 있다. 물량은 위로 보내 시장에서 교섭력을 갖게 하고, 읍면단위 조합은 조합원이 생산한 농산물이 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도록 지도·교육·토론하고 갈등을 극복해나가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경제사업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지 않았다. 자본은 물론이고 사람에 대한 투자도 마찬가지이다. 민간 기업은 잘하는데 농협이 안 되는 것은 투자에 달려 있다. 개별 조합이 수행하던 경제사업을 점차 조합공동사업법인이 수행한다. 그러나 운영자본과 시설투자가 부족하다. 이런 곳에 중앙회 자본이 투입되고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소비지에도 투자가 필요하다. 대형유통업체에 대응할 만한 판매처가 있어야 한다. 지역조합들이 대형유통업체에 휘둘리고 있다. 이런 교섭력의 문제는 인적·물적 투자에 의해서 극복 가능하다.

 

농민조합원이 바라는 농협

농협사업구조 개편이 논의되고 있다. 논의에서 농협이 직면한 여러 문제와 해결방안이 함께 거론되고 있는 지 의문이다. 경제사업에 적극 투자함으로써 농민조합원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농협 자체 계획이 발표된 적이 없다. 반드시 스스로 투자 계획을 발표해야 한다. 자율성을 강조하는 협동조합이 아닌가.

반면에 사업구조만 합의하고 나서 자본금 문제와 경제사업활성화 문제를 차후에 논의하자는 정부 계획도 신뢰하기 어렵다. 경제사업 투자는 보는 시각과 시기적 필요성에 따라서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할 수 있다. 누가 보장하고 책임질 것인가?  자본금 문제, 조직 분리의 형태, 세금 문제, 보험 문제, 복잡한 사업구조 개편 논의 속에 현장 농민조합원은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다. ‘50년 동안 농업을 명분으로 축적한 자본금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경제사업에 투자하여 농민조합원이 생산한 농산물을 제 값에 팔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 이상 이러한 요구가 매년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농업계와 농협에 던져진 마지막 숙제여야 한다.

파일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