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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본, 농촌 지역을 유지하는 힘 새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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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정 기고 | 2024년 8월 18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농촌과 도시는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에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답하곤 한다. 동네 가게에서 외상이 되면 농촌이고 안 되면 도시라고. 값은 나중에 치르기로 하고 물건을 사거나 파는 일을 외상이라 하는데, 판매자와 구매자가 서로 신뢰하지 않으면 애초에 성립하기 어려운 거래 방식이다. 외상이 가능하다는 것은 지역사회의 주민들(적어도 가게 주인과 물건을 사려는 주민) 사이에 신뢰가 형성돼 있음을 뜻한다. ‘외상 가능한 곳이 농촌’이라는 주장은, 사회적 신뢰를 농촌 지역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사회적 신뢰의 다른 이름은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중요한 까닭은, 자본만 충분하다면 토지든 노동력이든 원재료든 생산에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본은 다른 유형의 자원과 쉽게 교환할 수 있는 자원이다. 평당 10만원짜리 토지를 수백평 가졌다고 해서 그 땅을 150만원짜리 냉장고와 교환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폐(자본)가 충분하면 그것을 토지나 냉장고와 바꾸는 건 쉽다. 주민들 간의 신뢰를 사회자본이라 부르는 까닭은, 신뢰가 화폐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외상 거래 당사자 간의 신뢰는 일종의 담보물처럼 기능한다. 물론, 신뢰가 사회자본의 전부는 아니다. 자원봉사나 지역사회 조직 활동을 함께하면서 형성되는 관계망(Network)이나 지역사회 조직도 사회자본의 중요한 부분이다.


신뢰, 주민들의 관계망과 공동활동, 지역사회 조직 등과 같은 사회자본은 수면 아래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빙산의 밑부분과 같다. 눈에 띄지 않아 쉬이 간과된다. 하지만 이 같은 사회자본이야말로 생산과 소비, 공유재(Commons) 관리, 주민자치 등 여러 측면에서 농촌 지역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원이다. 때로는 빈곤하거나 자금 유동성이 적은 농촌에서 민간 투자나 정부 보조금 등과 같은 현찰을 대신하기도 한다.


‘품앗이’로 대표되는 협동 농작업은 임금을 지불하는 대신 농업노동력을 교환함으로써 돈(화폐) 없이 농업노동력을 확보하는 메커니즘이다. 지금도 여러 농작업 현장에서 ‘호혜적 노동 교환’이 이뤄진다. 농민들 사이의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마을회관, 마을 길, 화단, 저수지 등 마을 안팎의 시설이나 경관은 어느 개인의 재산이 아니며 대개는 지방자치단체의 소유인데, 공공 부문이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하기 일쑤다. 농촌주민들은 그것을 공유재로 인지하면서 자발적 조직을 결성한 바탕 위에서 공동의 노동으로 유지하고 관리한다. 심지어 마을 노인의 안부를 살피고 끼니를 챙기는 활동도 부녀회 등 지역사회 조직을 기반으로 전개된다. 외식 같은 일상적인 소비활동에 관한 의사결정도 메뉴의 ‘가성비’ 못지않게 음식점 주인과의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농촌 지역사회에 촘촘하게 형성된 관계망과 각종 주민 조직은 결국 ‘지역사회에 중요한 공적 의제(Agenda)’를 결정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자치의 바탕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농촌의 사회자본이 충분히 유지되고 있는가? 도시보다 농촌에서 사회자본이 더 많이 형성돼 있다는 게 오랫동안 받아들여진 통설(通說)이다. 과연 지금도 그럴까? 최근의 몇몇 자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외상 가능한 곳이 농촌’이라는 전언(前言)을 철회해야 할지도 모른다. 통계청의 <사회조사>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23년까지 15년 동안 ‘몸이 아플 때 도와줄 사람이 없다’, ‘갑자기 목돈이 필요할 때 빌릴 수 없다’, ‘우울할 때 사적으로 대화할 사람이 없다’는 응답률이 도시보다 농촌에서 더 높았다. 마을 주민들의 공동활동도 빠르게 줄고 있다. 전국 100여개 농촌 마을을 매년 조사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농산어촌 마을 패널 조사 사업>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마을 주민들의 공동활동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조사된 마을의 비율이 불과 4년 사이에 급격하게 높아졌다. 예를 들면, 2020년에는 도로 및 농수로를 주민들이 공동으로 관리하지 않는다는 마을의 비율이 41.5%였는데 2023년에는 53.9%가 됐다. 마을 안길 청소나 제초 같은 공동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마을의 비율은 18.6%에서 30.4%로 증가했다. 농촌의 사회자본이 빠르게 침식되는 중이다.


도시·농촌을 불문하고 한국 사회 전체가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오면서 사회적 신뢰나 지역사회 조직 활동 같은 것은 점점 약화되는 중이다. 거기에 고령화나 인구 감소 같은 요인이 겹쳐 그 속도가 붙는 형국이다. 정책으로 사회자본을 증진하기가 쉬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왕에 추진하는 정책사업의 방식이 농민이나 농촌주민의 공동활동, 협동, 신뢰 등을 권장하도록 바꿀 수는 있다. 가령, 일본의 다원적 기능 직불제처럼 주민의 공동활동을 전제로 직불금을 지급하는 방식의 선택형 직불제를 취할 수 있겠다. 수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농촌 지역개발 사업’에서도 더 세심하게 지역사회 조직과 주민들의 협동을 고려해 추진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 화폐나 물리적 시설은 사용할수록 소진하지만, 묘하게도 사회자본은 쓰면 쓸수록 증진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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