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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의 허용 한도는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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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0년 4월 8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매사에 수치를 엄격하게 따지는 게 능사는 아닐 테다. 그러나 보통은, 특정할 수는 없어도, 허용할 수 있는 수치의 한도가 상식적으로 통용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수질 측정치 같은 게 있다. 생화학적 산소 요구량(BOD)이 8ppm 이상이면 5급수로 판정하는 수질기준이 있다. 매우 오염된 물이라고 간주해 농업용수로 사용하기에도 부적합하다고 판단한다.


A라는 마을의 논에서 물을 떠 측정했더니 BOD가 8.1ppm이었고 그 옆 B마을에서는 7.9ppm이었다고 가정해보자. A마을의 농업용수는 고약하게 오염되어 농사에 쓸 수 없고, B마을에서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제도상으로는 8ppm을 기준으로 정했지만, 실제로는 A마을이나 B마을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게 옳다. 그 정도의 차이는 측정상의 오차 때문일 수 있다. 측정 하루 전에 비가 왔느냐 안 왔느냐에 따라서 수치가 오락가락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일년 동안 여러 번 측정했는데 C마을의 측정치는 7.1~7.5ppm이고 D마을의 측정치는 9.3~10.2ppm 범위였다면, 사정이 다르다. D마을에서는 수질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해도 반대할 사람이 별로 없으리라.


숫자 이야기를 꺼낸 건, 명백한 허수(虛數) 들이 농정의 기본 제도에 큰 짐이 되고 있어서다.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들판의 작은 허수아비는 참새라도 쫓으니 기특하지만, 제도상의 큰 허수는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가령, 조선 시대에 죽은 사람까지 산 것처럼 허수를 만들어 세금(군포)을 억지로 징수했던 백골징포(白骨徵布)는 국가 질서가 무너진 대표적인 사례로 역사 교과서에도 나온다. 원인이나 결과의 방향이 다르므로, 조선 시대의 삼정문란(三政紊亂)에 비견할 바는 당연히 아니겠지만, 현재 농정의 기본 제도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허수 또는 ‘숫자 없음’은 그대로 두면 적폐가 될 조짐을 보인다. 예를 들어본다.


농지법의 규정을 일탈한 농지 소유와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이른바 ‘농지의 관행 임대차’ 규모가 문제인데, 이 경우에는 허수라기보다는 정확한 숫자가 없는 게 문제다. 우리나라 행정의 여러 분야에서 문제가 생기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전수조사 카드를 꺼내곤 하는데, 농지 문제의 경우도 전수조사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다. 실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수치가 필요한 건 맞지만, 수치가 해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다.


농협 조합원 수가 2014년에 235만 명이었던 것이 근년에 줄었지만 여전히 200만 명을 훌쩍 넘는다. 일년 내내 농사일을 하든 간혹 일용직으로 농업노동을 하든, 어쨌거나 농업 종사자 수가 대략 140만~150만 명이라는 게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를 통해서 확인된다. 또 기본적인 농업 통계조사에서 한국의 농가 수가 100만 가구쯤 될 것으로 확인된다. 농협법에 따르면 농업인만 농협의 정조합원이 될 수 있으니, 적어도 60만 명 이상이 ‘허수 조합원’일 테다. 누군가는 농협 조합원 중에 무자격 조합원이 얼마간 있는 게 무슨 대수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큰 문제다. 좁은 지면(紙面)에 다 풀어놓기 어려울 정도로 문제가 많은 허수다.


결정적으로 심각한 허수가 농업경영체 등록제도에 서식한다. 현재 농업경영체로 등록한 농가 수는 168만 가구가 넘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통계상의 농가 수는 100만 가구쯤 된다. 6만도 아니고 60만 가구 이상의 차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나 큰 허수가 쌓이기까지 몇 가지 원인이 작용했음을 모르지 않는다. 통계청 조사상의 농가는 인구학적 개념에 바탕을 둔 단위이고, 농업경영체로 등록된 농가는 사업체 개념에 가까운 단위여서 성격이 다르다는 항변을 할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농업경영체로 등록된 농가 중의 상당수는 독립된 사업체 단위로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의무 등록제가 아닌 상태에서 농업경영체 등록을 유도하려고, 그동안 직접지불금 등 각종 보조금, 융자, 기타 지원 정책의 수혜자가 되려면 농업경영체로 등록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인구학적으로든 경영학적으로든 실제로는 한 농가인데 서류상 분리 독립된 농가들인 것처럼 등록하는 것, 소위 ‘경영체 쪼개기’ 관행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허수를 낳았다고 짐작한다. 사정이 이렇다는 것을 농정 당국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지원정책에 따라서는 농업경영체로 등록된 것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고 다른 보정 수단을 장착하기도 한다. 애초에 허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일이고, 미봉책일 뿐이다.


바람직하다고 여기든 그렇지 않든, 숫자를 바탕으로 막대한 재정을 지출하는 게 농정의 현실이다. 에누리 없는 장사 없다고 하지만, 그 에누리도 허용되는 범위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만 원짜리 물건을 9,000원에 사겠다고 하면 에누리가 될 수도 있지만, 4,000원에 팔라고 하면 흥정이 깨진다. 건축물이나 산업 기계에는 허용하중(許容荷重)이라는 개념이 적용된다. 실제로 사용되는 재료의 안전상 허용할 수 있는 무게의 범위를 뜻한다. 허용하중의 몇 배가 되는 수치를 정하고 ‘안전률’이라고 부른다. 이 안전률을 초과하는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건물이나 기계를 설계·제작해야 한다.


농정 제도와 관련된 숫자 중에 정확하지 않은 부분은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책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완벽한 숫자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식적인 한계, 즉 허용 한도를 벗어난 숫자를 그대로 두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데 다짜고짜 ‘숫자를 정확하게 계산하라’, ‘무자격자인데 등록되어 있거나 가입되어 있으면 엄단하겠다’는 식의 호통으로 사태가 개선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문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발생한 허수들이다. 허수 발생 및 누적의 원인을 심층 분석하고 발본(拔本)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당연히 고된 작업이고, 지난(至難)한 토론을 거쳐야 하고, 시간이 걸린다. 비용도 들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게 정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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