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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농민의 수고, 이해되지도 감사받지도 못한 노동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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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0년 2월 7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나주에 이사 올 때, 연구원 뜰에 금목서(金木犀) 한 그루도 새 식구인 양 자리를 잡았다. 사시사철 푸른 잎 생생하면서, 늦가을엔 어김없이 주황색 꽃을 내보였다. 금목서꽃이 피면 달콤한 향기 은은하게 퍼졌다. 해마다 가을이면 그 앞에 멈춰 서서 황홀한 정취를 만끽했다. 그러기를 서너 해, 금목서 나무가 덜컥 병들었다. 잎이 시들고 꽃을 피우지 못했다. 나무를 잘 아는 이 불러서 알아보니, 뿌리 닿은 심토(心土)에 물 빠짐이 안 좋아 나무가 상했단다. 그제야 ‘뿌리’에 생각이 이르렀다. 풀과 나무의 생명은 뿌리에 있다는 것쯤, 누구든지 아는 상식이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안 흔들리고” 운운하는 용비어천가 한 구절쯤, 고등학교 때 들어 30년 넘게 잊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작 눈으로 보고 향기 맡을 수 있는 꽃을 제 욕심껏 즐기면서도, 그 뿌리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요즘 세상 굴러가는 이치가 그러하다. 세상을 뒷받침하는 밑바탕 수고를, 세상이 알아주는 일은 드물다. “풍경이 기원을 은폐한다”(가라타니 고진)는 말을 내 맘대로 갖다 붙이자면, 정성어린 먹거리와 따뜻한 환대로 표상되는 농촌 풍경 뒤에는 그 기원을 이루는 여성 농민의 수고와 노동이 은폐된 채로 남겨진다.


식탁에 날마다 오르는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 노동, 그 수고의 절반 이상을 여성 농민이 감당한다. 땅바닥 가까이 몸을 낮추어 호미로 풀 매거나 손으로 모종 솎아내는 알뜰하고 고된 밭농사 일이 주로 여성 농민의 몫이다. 수십 마력짜리 트랙터에 올라앉아 들판을 누비는 ‘기계작업’보다 근골격계 질환 발생의 가능성이 몇 배는 더 높아 보인다. 그런데도 여성 농민의 농업 노동은 부수적이거나 보조적인 것으로나 간주하기 일쑤다. 농산물을 수확해 선별하고 포장하는 것도 대개는 여성 농민의 일이다. 씨앗 관리는 전통적으로 여성 농민의 책임이었다. (사실은,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농사의 그 모든 과정을 통틀어, 여성 농민의 손길을 거친 품이 절반 이상이지만, 농산물을 출하할 때는 대부분 남성 가구주의 이름으로 출하한다. 농협 통장 하나 없이 평생 살다가 65세가 되어 기초연금을 받을 때 비로소 자신 명의의 통장을 만드는 사례도 흔하다고 한다(구점숙, 《우리는 아직 철기시대에 산다》).


수입은 초라하고 지출은 많아서 쓰기 싫다는 가계부만 쓰는 게 아니라 김공장, 농산물 선별장, 상점, 음식점 등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찾아 농업 소득만으로는 끝내 부족한 농가 소득을 채우는 것도 여성 농민의 일이다. 자녀를 돌보는 일에서부터 집안 어르신 식사와 병환을 보살피는 세세한 ‘돌봄 노동’도 여성의 몫이다. 어쩌다 명절이나 휴가철에 시골을 찾아오는 일가친척이나 지인들을 맞아 청소하고 음식 장만하는 수고와 문 앞에 나가 맞이하고 손님 머무르는 동안 이모저모로 살피는 ‘감정노동’ 또한 여성 농민의 몫이다.


여성 농민의 역할은 농사나 가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농촌 지역사회에서 필요한 온갖 종류의 봉사 영역으로 확장된다. 60세 전후 초로(初老)의 여성 농민이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에서 70세 넘은 마을 어르신들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는 풍경은 아주 흔하다. 그저, 마을 부녀회원이기 때문에 부여되는 의무다. 한 동네에 살면서 혼자서는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노인들을 부녀회가 아니면 누가 챙기겠는가? 리 수준을 넘어서 읍·면이나 시·군 단위에서 벌어지는 이러저러한 행사들, 가령 면민 체육대회나 지역축제 같은 행사가 있을 때 나아가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거나 행사장을 안내하는 일도 여성 농민들에게 할당되는 ‘봉사 아닌 봉사 활동’이다.

심지어는 농업인의 날 행사 때에 여성 농민에게 그런 일을 맡겨서 빈축을 산 경우도 있단다. 


이 같은 여성 농민의 수고에 어떤 노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건조한 사고방식에 갇힌 정책 연구자는 헤아리지 못하고, 인문학자나 관심을 두는 “시장에서 교환되지 못한 노동, 대가 없는 이바지로 주어진 노동, 충분히 이해받거나 넉넉히 감사받지 못한 노동, 기존 교과서들에 등재되지 못한 노동, 작은 기미와 희미한 보살핌으로만 드러난 노동,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조차 몰랐던 노동, 그리고 어떤 미래에서 다가올 어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만 그 가치와 의미가 수용될 노동”(김영민, 《집중과 영혼》)의 대표적 사례일까? 여성 농민의 수고와 노동은 농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뿌리’라는 점을 떠올려본다.


들판에서, 집안에서, 지역사회에서 온갖 수고를 다하는 여성 농민에게, 사회적 지위는 어떻게 인정되고 법률적 권익은 얼마나 보장될까? 여성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나 법제나 사회문화적 여건의 불비(不備)를 열거하자면 이 지면(紙面)을 초과할 수밖에 없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알 만한 일이지만, 고민해야 할 지점을 대략 요약하자면 이렇다. 지역사회의 이러저러한 책임 있는 자리에 여성 농민이 얼마나 참여하는지 그 비율을 지표로 만들어 살펴볼 수 있을 테다. 직업이 농업인데다가 여성이어서 받는 이중적 차별과 불평등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일도 필요하다. 정부 정책이나 통계 등이 양성평등을 달성하지 못하거나 성인지(gender-sensitive) 관점을 결여한 부분을 밝혀내는 일도 중요하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정책 대안을 다양하게 마련하고, 그것들을 실행할 재정과 사회적 지지를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다. 내년, 2021년부터는 정부가 '제5차 여성농업인 육성 기본계획'을 시행해야  한다. 올 한해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중요한 과제가 눈앞에 있다. ‘충분히 이해되거나 넉넉히 감사받지 못한’ 여성 농민의 입장에서, 정책 논의가 활발하게 펼쳐져야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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