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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농업 혁신, 무지와 맹신과 편견을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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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19년 11월 5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몇 년 전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한때 세계 최강 ‘불패소년’이었던 이세돌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비트코인 광풍과 더불어 블록체인 기술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나 같은 문외한도 인터넷을 뒤져, 그게 자전거 페달과 바퀴를 연결하는 체인 같은 종류의 기계 부품이 아니라 ‘분산형 데이터 저장 기술’이라는 것쯤은 알게 되었다. 스위스의 다보스라는 동네에서 저명인사들이 모여 ‘4차산업혁명’을 거론한 이듬해 한국에서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라는 사뭇 권위 높아 보이는 이름의 기구가 설치되었다.


과학기술의 진격은 참으로 쾌속이어서 인터넷이나 언론방송에 떠도는 얘깃거리에 그치지 않고 금세 우리 생활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예를 들어보자. 일년 넘게 동네를 떠나 머물렀던 어느 농촌에서 병충해 방제에 드론을 사용하는 광경을 보았다. 돌아와보니 내가 사는 동네에 ‘드론 학원’이 생겼다. 드론 운전법은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 과목으로도 인기라고 한다. 폭격기 대신 드론을 사용하는 것을 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나갔다. 일상생활 곳곳에서 드론이 활용된다. 인구 3000여명 남짓,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하나밖에 없는 시골 동네에서도 어린 시절 연 날리듯 드론 띄우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약 22년 전 대학원에서 인터넷을 처음 접했을 때 ‘충격 먹은’ 기억을 떠올려본다. 그러고 보면 요즘의 과학기술 진보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신기술에 친숙해질 것이다. 아니, 그리고 지금은, 놀라지 말아야 한다. 과학기술 발전에 압도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밝음과 어두움을 찬찬히 살피는 지혜가 필요하다. 대상에 압도되면 세밀한 분석은 불가능해진다. 비용과 편익의 셈법도 흐릿해진다. 무엇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치 말아야 할 근본적인 가치를 성찰할 용기를 잃기 십상이다. “뭣이 중한디?”라는 질문을 놓치기 쉽다. 괴물의 거대하고 난폭한 몸짓과 요란한 울부짖음에 압도되면, 급소를 알아내 반격하거나 도망칠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비유한다고 해서 오해하지는 마시라. 나는 지금 과학기술이 괴물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과학기술에 압도되거나 겉모습만 보고 경도되는 태도야말로, 오히려 과학기술을 괴물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 혁신이 필요하지만, 농업 혁신 또한 해묵은 숙제다. 농업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 사람도 적지 않을 테다. 무엇보다 농민들이 각자의 영농을 개선하려고 시비법이나 작부체계 등 농법을 고민하는 게 일상이고, 농업 관련 연구자나 정부 관료들 중에도 진지한 고민을 일삼아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수두룩할 테다. 그런데 무슨 투자증권회사에 근무하는 이가 “농업 부문의 개발도상국 혜택이 없어지면서 정부는 보조금 지급 등을 통한 농업 보호보다 부가가치 창출을 통한 농업경쟁력 확보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스마트팜 산업을 육성해 글로벌 농업 경쟁력을 키우는 일이 국가적으로도 시급한 과제가 됐다.”라고 훈수를 뒀다는 신문기사를 보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무지(無知)인가, 맹신(盲信)인가? 과장해 비유하자면, 어느날 4차산업혁명의 세례를 받고 개종(改宗)했노라며 나타난 사람들이, 나처럼 굼뜨고 의심 많은 자에게 ‘불신지옥’ 카드를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건 곤란하지 않은가? 무지나 맹신이나, 모두 과학의 적(敵)이다.


문제는, 수천억원의 나랏돈이 ‘스마트’, ‘4차산업혁명’ 등의 꼬리표를 달고 농업 분야에 투입될 예정인데, 과연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깊게 검토한 결과인지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가령, 평당 100만원은 들어갈 유리온실을 수만평 규모로 지어야만 ‘스마트’한 ‘혁신’인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 과수원에서 바닥에 습도 감지 센서를 설치하고 자동 점적관수 시설과 연결하니, 바쁜 일 있어서 농장을 비워도 흙이 마르면 저절로 관수가 되어 편리하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설치 비용이 500만원으로 저렴하다는 점이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대형 시설을 갖추어야만 스마트할 거라는 편견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근년에 유럽연합(EU)에서는 혁신이야말로 유럽 농업 앞에 놓인 중요한 도전이라고 선포하고, 연구자를 포함하여 각계각층의 지혜를 모으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로 “전환기 농업 지식 및 혁신 체계에 대한 성찰”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펴냈다. 그 내용 중 농업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관점을 정리한 부분이 눈에 띄어 소개한다. 이 보고서는 ‘과학 주도형 연구’와 ‘혁신 주도형 연구’를 구별하고, 두 종류 연구 사이에 불균형을 해소하려면 ‘혁신 주도형 연구’에 더욱 힘써야 한다고 권고했다. ‘과학 주도형 연구’는 과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동기에서 출발하며, 연구 결과 확산 단계에서나 이용자들이 참여하게 되며, 과학적 수준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며, 연구기관 중심으로 수행되며, 과학연구개발 정책의 영역에서 다루어진다. 이와 달리, ‘혁신 주도형 연구’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현재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하며,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연구 의제를 설정하거나 문제를 규정하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연구 과정 전체에 이용자-농민들이 참여하며, 실용적 유용성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며, 생산자 및 지식 이용자들의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수행되며, 혁신 정책의 영역에서 다루어진다.


15조원이 넘는 농림축산식품부 예산 중에 연구개발 분야에 투입되는 예산이 1조원이 넘는 것으로 안다. 그처럼 막대한 재정이 진정 ‘혁신’을 지향하는 연구개발을 지원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 정책 자체를 ‘혁신’해야 할 필요는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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