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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칙하는 농민, 세상을 빚어내는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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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19년 6월 7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품목마다 그리고 농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농산물 시장 가격은 대체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낮은 수준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농민이 직접 만들어내지 않은 투입재를 사서 쓰거나 노동력을 고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점점 확산되는데, 비용은 오르면 올랐지 내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중 쥐어짜기’(double sqeeze)라는 말이 등장했다. 소득 수준이 법률로 정한 최저생계비 수준에 못 미치는 농가가 적지 않다. 비교적 젊고 근력 있는 농민 중에는, 농업소득이 불충분해 가욋벌이에 나서는 농민이 그렇지 않은 농민보다 훨씬 더 많은 듯하다. 재배할 작물은 말할 것도 없고, 품종이나 농사기술이나 판로 측면에서도 농가가 운신할 여지는 계속 좁아지기만 한다. 영화에서 보듯, 밀폐된 공간에 갇힌 인질의 턱 밑까지 물이 차올라 숨통을 조이는 듯한 압박감을 연상시킨다. 한마디로, 농민의 ‘자유’는 축소되고 박탈과 의존이 심화·확대되고 있다. 이런 현실을 확인하느라 굳이 추상적인 통계 수치를 분석할 필요는 없다. 인구 4,000명쯤으로 평균 수준인 면(面) 지역 흔한 동네를 찾아 실눈 뜨고 매의 눈으로 살펴보시라.


농민이 농사짓고 사는 모습은 흔히 외부 조건이 작용한 결과라고 설명된다. 농산물 가격, 영농 투입재 가격, 농민이 아니라 과학기술자가 개발한 테크놀로지, 국가의 농업정책 등이 영농활동의 꼴을 빚어내는 동인(動因)이라고들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장, 정책, 기술 등의 외부 조건과 무관하게 제 맘대로 농사지을 수 있는 농민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농산물 시장 개방을 앞두고 격렬한 논쟁과 저항이 있었던 1990년대 초반이나 지금이나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는 의존과 박탈, 이 같은 농민의 조건을 설명하는 데 외부 여건의 힘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학자들의 상황 설명보다 더 긴급하고 더 필요한 것은 가혹한 외부 압력을 견뎌내고, 이 질곡을 뚫어낼 힘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사실,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는 물음 자체가 함정이다. 농민의 힘은 외부 환경에서 나올 성싶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한 싯구를 인용하자면,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처럼 농민층에 내재한 스스로의 힘을 봉인에서 해제할 방도를 찾는 게 먼저일 듯하다. 어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에 관해 어딘가에서 들은 의견을 하나쯤 전할 수는 있겠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적극적으로 ‘반칙하는 농민’이 많이 등장했으면 좋겠다. 기존 질서에 농민의 삶을 지배하고 조형(造形)하는 ‘절대반지’ 같은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순간, 그 믿음은 현실이 된다. 한때 금서(禁書)였던 책에서 인용하자면, “왕이 왕일 수 있는 것은 주변에서 왕을 왕으로 모셨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다.


어느 철학자에 따르면, 반칙의 실제 뜻은 ‘형식 파괴’라고 한다. 새로운 질서는 낡은 형식을 어기는 자, 즉 반칙을 감행하는 자로부터 비롯된다. 반칙은 으레 변방에서 또는 제도적 공백에서 일어난다. 1970년대에 정부가 녹색혁명을 독려하던 때에 수확량 감소를 감수하면서도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안 쓰겠다는 유기농업 실천은, 당시로서는 확실히 반칙이었다. 산지출하 규모를 키우고 현대화된 물류체계를 갖추어 시장 지배력을 지닌 대형 소매유통업체의 코드(code)에 맞추어야 한다고들 소리 높여 주장할 때, 그 대열에 합류할 수 없는 고령 영세농이 단돈 1만 원어치 푸성귀라도 들고 나와 팔 수 있는 ‘로컬푸드 장터’를 만들자는 발상은 당연히 반칙이었다.


아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1990년대 후반에 농촌관광의 한 분기점을 이룬 최초의 팜스테이 농민 이수인 씨도 반칙으로 새 길을 뚫어낸 이다. 이런저런 농사에 실패하고 생각 끝에 텃밭에 봉숭아 한 무더기 심었다가 그 꽃을 거두어 서울의 유명 여자대학교 앞에서 팔았다고 한다. 그때 이수인 씨는 ‘농업이라는 것이 오로지 먹거리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농장이 돌봄의 장소가 되거나 교육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 사회적 농업, 농업이 농작물만 돌보는 게 아니라 환경도 돌보는 실천이기도 하는 환경농업 또는 농생태학 운동 등 다기능 농업이 그다지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실천들이 처음에는 모두 ‘반칙’으로, 즉 농민의 ‘참신성’(novelty) 실험으로 출발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농민의 참신한 실천이 법규를 위반하는 사법적 의미의 ‘반칙’일 수도 있다. 가령, 어느 농민들이 이른바 유기농업 자주인증제를 한다면서 스스로 ‘유기농’이라는 인증 표지를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현재로서는 법규 위반일 테다. 정부가 ‘농업의 6차산업화’라는 명목으로 농민의 직접 가공을 장려하지만, 사실 자본을 갖추지 못한 농민들 중에는 시설기준이나 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 등의 인증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채 농산물 가공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법규 위반이더라도, 그런 반칙들을 묵인, 방조, 권장해야 할지도 모른다. 합리적인 반칙이 지속되면 불합리한 규제와 통제의 질서를 바꿀 정치적 힘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농민들은 끊임없이 ‘참신한 반칙’을 수단 삼아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인 환경에 저항해왔다. 그런 반칙들이 모이고 쌓여 제도를 혁신하거나, 정책 방향을 바꾸거나, 사회적·문화적 통념을 바꾸거나, 자연적·물리적 현실을 변화시킨 사례는 많다. 이것이 바로 농민이 수동적이기만 한 ‘의존’과 ‘박탈’의 존재가 아님을 보이는 증거다. 농민이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농민은 역사 전체를 통해 늘 운신의 폭을 확보하려 다양하게 참신한 방법으로 반칙을 일삼아왔다. 이는, 농업이 세상을 빚어내는 여러 가지 형식 중 하나다. 반칙하는 농민을 응원하며, 반칙의 가능성이 높아지도록 운동장 기울기를 바꾸어야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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