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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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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이 귀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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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19년 5월 8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세상에는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 많다. 시장 경쟁력 따위와 견줄 수 없이 더욱 소중한 게, 어느 철학자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인문(人紋) 즉 ‘사람살이의 무늬’다. 그런데 환금불가(換金不可)의 인문학적 가치란 과연 무엇인지를 속 깊이 헤아려 후세에 전하려는 태도나 노력은 드물다. 이쪽 동네 농업·농촌 판도 마찬가지여서, 각박한 시장에서 경쟁해 이기는 것만이 농업의 중요한 과제인 것처럼 인지되는 착시 현상이 유행병처럼 퍼진 지 오래다. ‘돈 버는 농업, 농업 경쟁력 제고’ 운운하는 언설이 횡행하면서 부지불식 간에 농업은 투자수익률이 극히 낮은 경제활동이라고만 규정되었다. 그리고 ‘엄혹한 시장에서 생존에 성공할 선택된 소수의 농업경영자가 될 수 있게 경쟁력을 갖추라’는 지침이 이 판의 황금률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시골 집에서 며칠 머무는데, 어린 아들 녀석이 아침부터 앞마당 한 구석에서 막대기로 땅을 파고 동전을 묻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외조부께서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묻자, 네 살 짜리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증조 할아버지,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난다면서요. 그래서 돈 나오라고 돈 심고 있어요.” 그때는 어린애다운 생각이라면서 웃어 넘겼지만, 나중에라도 잘 가르쳤어야 할 것은,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이치는 사실 ‘돌봄’과 ‘가꿈’이라는 애정 어린 노동을 바탕으로 한다는 또 다른 이치였다. 벼가 자라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아이들이 무언가를 돌보는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서, 초등학교에 ‘텃논’ 만드는 일에 몇 년째 열성인 어느 농부는 이렇게 말한다. “농작물을 키우는 것이나 애들 키우는 것이나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요즘 초등학교에는 동물농장도 없고, 실과 과목에서도 컴퓨터나 가르칠 뿐 농사일을 접할 기회도 없으니 앞으로 이 나라 교육이 걱정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십 년 땅에 붙어 농사지으며 소박한 살림을 꾸려온 시골 할머니들의 말이나 글에서는 지금도 인문학의 정수(精髓)라 할 만한 콘텐츠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회갑이 넘은 나이에 한글을 배운 97세 시골 할머니가 쓴 일기를 간추린 책이 얼마 전에 나왔다(『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옥남 지음). 그 일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고구마를 다 죽은 것을 심긴 했는데 살 것인지 두고 봐야지. 그리고 밭에 조이 모종 뵌 것을 뽑아가지고 오다가 동일네 밭에도 심어놓고 수동집 밭에도 좀 심었는데 잘 키울 것인지 두고 봐야 알지. 나는 곡식이 귀여워서 키우는 걸 재미로 알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는 것 같아서.” 여기에서 ‘곡식’을 ‘어린이’로 바꾸어서 읽고 생각해 보시라. 특히 어린 학생을 자녀로 둔 학부모,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교사들, 교육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고위 관료들께 권한다. 시골 할머니가 농작물 대하는 마음가짐에서 정녕 새겨둘 만한 게 없을까? 또는 농사를 온전히 ‘돈 버는 일’로만 환원해 생각하는 버릇을 지닌 농사를 잘 모르는 이들도 텃밭이나 베란다에 상추, 토마토, 고추 모종이라도 조금 심어 키워보면서 ‘곡식이 귀엽다’는 그 말을 생각해보시라 권한다.


몇 해 전 경상도 어느 곳에서 공공 정책의 일환으로 농업 일자리를 알선·소 개하는 일에 종사하는 어떤 이가, 일당 4만 원을 받으며 사과 과수원 일하러 다니는 할머니 몇 분을 만났다. 당시 그 지역에서는 농작업 일당이 대체로 하루 6만 원쯤이었다. 그래서 4만 원에도 일하러 다니는 할머니들께 “할매요, 딴 사람들은 다들 6만 원 받고 일 다니는데, 4만 원 받고 그 일을 할 만합니꺼?”라고 말을 건넸다. 돌아은 대답은 이랬다. “아이고. 내가 그 집에 일하러 가서 보이, 그 집이나 우리 집이나 사는 거이 비슷타 안카나? 우째 돈 더 달라꼬 할 수 있나?” 최저임금 수준이 법률로 정해져 있는 것도 모르는 시골 할매들이라고 말할 것인가? 여기에는 법률이나 노동시장의 작동 원리를 한참 벗어난 차원의 어떤 논리가 있는데, 확실히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가치가 녹아 있는 독특한 ‘노동경제학’이다.


몇 년 전 지방선거 때의 일이다. 당시 팔순을 한참 넘기신 시골의 외할머니께서도 투표를 하고 오셨다. 반쯤 농담으로 누구를 찍으셨느냐고 묻는 물음에,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군수니 의원이니 하고 싶어 그렇게 안달인 사람들이 열 명도 넘는데, 누군 되고 누군 안 된다고 할 수 있나? 그래서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찍었지. 마늘이든 양파든 배추든 다 똑같이 잘 키워야지.”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의 원리를 할머니께 교육시켜야 할까? 아니면, ‘누군 되고 누군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다’며 선택과 배제를 거부하는 그 ‘정치철학’의 유래와 논리를 되짚어 생각하는 게 나을까?


분석해서 정돈하기는 어렵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삶에서 우러나는 말과 생각에는 그리 간단치는 않고 깨닫기도 쉽지 않은 어떤 지혜가 있다. 요즘 학교에서는 잘 가르쳐 주지 않으며, 돈 주고 학원에서 배울 수도 없는 그런 지혜 말이다. 그게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자연에 속한 생명을 부지런한 노동으로 돌보고 가꾸면서,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공존하는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본다. 지난 겨울에, 곧 3학년이 될 농업계 고등학교 학생들 앞에서 ‘농민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농사를 안 짓는 내가 답하기는 어려운 문제였다. 적지 않은 시간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농민이란 시골에서 부지런히 농사지으며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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