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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미나리’와 현상 유지 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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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지성태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17년 10월 27일
지 성 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


필자의 직장이 소재한 전라남도 나주는 겨울 미나리 집산지이다. 겨울 미나리는 벼 후작으로 초가을부터 다음해 모내기 전까지 재배된다. 벼 수확이 끝나면 휴지기 없이 논에 물을 가두고 여름내 한쪽 귀퉁이에 남겨두었던 미나리 모종을 파종한다. 미나리는 번식력이 강하고 생육이 빨라 해당 작기에 4회 이상 수확이 가능하다. 수익성도 높은 편이어서 농한기의 효자 작목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이처럼 미나리는 벼 후기작물로 손색이 없다. 미나리 외에 양파, 마늘, 보리 등도 벼 후작으로 재배된다. 밭작물 간에도 다양한 작부체계를 형성한다. 강원도의 풋옥수수+들깨에서부터 제주도의 기장+양배추에 이르기까지 지역별로 상이한 작부체계를 이룬다. 이러한 조합은 작물별 파종·수확시기, 토질과 기후의 적합도, 수익성, 생산 인프라와 기술, 판로, 노동력 투입·배분 등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에 기초해 농업인이 다년간 축적한 경험과 지혜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특정 지역에서 일단 작부체계가 형성되면 그 조합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농가는 이미 해당 품목 재배에 필요한 기술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고, 작목 전환 시 회수가 어려운 농기계, 시설 등의 매몰비용이 투입된 경우 신규 작목으로 전환하기는 쉽지 않다. 혹자는 이를 두고 농업인이 ‘관성적이다’ 또는 ‘보수적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농업인의 경향은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만약 농업인이 수익성 높은 작물만을 선호한다면 해당 작물 생산이 집중돼 심각한 공급 과잉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농업인은 대체로 특정 작목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으며, 작목을 전환할 때도 심사숙고하여 결정한다.

최근 쌀 공급 과잉에 따른 수익성 저하에도 불구하고 벼 재배면적이 크게 줄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벼 대체작목을 발굴하고 이를 적극 홍보함으로써 쌀농가의 작목 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특히 소득이 높은 작부체계를 소개하여 농업인을 설득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마늘+풋옥수수, 콩+봄감자, 청보리+노지고추 조합은 벼 단작에 비해 약 5배 높은 소득을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소득 작부체계를 수용하는 농가의 수는 제한적이다. 아마도 농업인의 심리적 기대소득이 그만큼 높지 않거나 신규 작물 재배에 따른 잠재적 리스크가 추정 소득의 일정 부분을 상쇄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인간이 지극히 계산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주류경제학의 기본전제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쩌면 잘 설계된 농업정책이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도 이러한 행동경제학적 관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노벨 경제학상 수상과 함께 행동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그것이 농업계에 주는 시사점은 수요자 중심의 농정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설득과 강요가 아닌 수요자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 즉 ‘넛지(nudge)’를 만들어내는 섬세함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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