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목록

KREI 논단

KREI 논단 상세보기 - 제목, 기고자, 내용, 파일, 게시일 정보 제공
가을, 나주 배를 먹는 때
3499
기고자 김창길
 이투데이 기고 | 2017년 9월 12일
김 창 길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

 

국민에게 전남 나주의 특산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배’라고 답할 것이다. 나주는 배의 주산지로 전국 생산량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나주 배는 삼한시대부터 재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배 재배 기록은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의 나주목 토공물(土貢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주 배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29년 조선박람회에 출품, 수상하면서부터다.

나주 배가 맛있는 이유는 천혜의 자연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나주 지역의 7∼9월 강수량은 670mm 내외로 배 재배에 최적인 기상여건을 갖추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영산강 유역의 유기질이 많고 배수가 좋은 양질의 토양 여건이 뒷받침하고 있다. 오랜 재배 역사와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기술을 활용하기 때문에 과질이 연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과즙이 많고 당도가 높을 뿐 아니라, 모양과 색이 좋아 소비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배는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지방과 칼로리가 낮은 과일이다. 수분이 풍부하고 미네랄 함량이 높아 성인병 예방에 좋다. 뼈, 혈액, 심장혈관에 필요한 미량 영양소가 포함된 과일로 알려져 있다. 배는 예로부터 기침과 천식 해소에 이용된 약재다.

최근에는 한국 배를 갈아 만든 음료인 ‘idH’가 해외 애주가 사이에 숙취를 없애는 마법의 약으로 알려지면서,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을 통해 성황리에 팔린다고 한다. ‘idH’는 필기체로 쓴 한글 ‘배’를 읽지 못한 외국인이 알파벳 문자로 착각해 쓴 글자다. 배로 만든 음료가 숙취 해소에 좋다는 사실은 호주연방과학연구기구(CISRO)의 실험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배의 껍질에 많이 함유된 알부틴은 미백 효과가 뛰어나 화장품용 기능성 소재로 주목받는다. 석세포는 환경문제로 부각된 마이크로플라스틱의 대안으로 활용 가능성이 연구되고 있다. 아삭한 식감과 풍부한 과즙은 천연 양념 재료로 이용돼 앞으로 활용가치가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배나무는 목재로의 가치도 높아 인쇄용 목판, 가구, 악기, 힘을 받는 골재로 이용된다고 한다.

이처럼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지만 배 재배면적은 2000년 2만6000ha에서 지난해 1만1000ha로 크게 줄었다. 생산량도 32만4000톤에서 24만8000톤으로 많이 감소했다. 1인당 배 소비량은 2000년 6.7kg에서 2016년 4.1kg으로 떨어졌다.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줄어든 데에는 농가 고령화와 도시개발 등의 영향도 있으나, 소비 부진에 따른 가격 하락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말 배 소비 저해 요인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가격이 비싸서’라는 응답이 42%로 가장 많았다. 이어 ‘당도가 낮아서(24%)’, ‘한 번에 먹기가 커서(19%)’ 순으로 조사돼 가격과 품질에 대한 개선이 시급한 실정이다.

내리막길을 걷는 배 산업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소비 트렌드를 반영한 품종과 재배 방법, 맛 위주의 상품 기준 개선과 효능에 대한 홍보 강화가 필요하다. 소비자 기호에 맞는 다양한 가공품 개발과 대량 수요처 발굴, 수출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도 요구된다.

요즘 나주 전통시장에는 노랗게 익어 출하된 원황배, 화산배, 황금배 등이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런 자태로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잡는다. 이번 주말엔 노랗게 잘 익은 햇배를 지인들과 나누며 나주 소식을 전해야겠다.

나주는 봄에 어디를 가나 하얀 배꽃으로 덮여 있다. 소담스럽게 핀 배꽃을 볼 때마다 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 시조가 떠오른다. 올가을에는 맛있고 영양덩어리인 배를 내 몸에 가득 담는 호사를 누려봄이 어떨까?

파일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