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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농이라는 생활양식과 지속가능성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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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강원도민일보 기고 | 2017년 2월 21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농업은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활동인가, 아니면 훼손하는 활동인가?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원시림이 남아 있는 곳, 가령 브라질 같은 나라에서 농업은 숲을 잡아먹는 약탈일 수 있다. 그런데 농업의 역사가 오랜 동아시아나 서유럽에서 농업은 자연을 관리하는 활동이라고 간주된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은 없기 때문이다. ‘자연생태계의 유기물 순환체계에 대한 인간 사회의 개입이자, 생태계 안에 인위적으로 경작환경을 만들어 유기물(농산물 및 축산물)을 추출하는 활동’이 농업이다. 농업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다. 그런데 그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따라, 즉 농업을 유지하는 사회적 생산체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해방 이후 한국 농업의 사회적 생산체계는 ‘가족농’ 생산체계였다. 

   농업을 ‘1차 산업’으로만 규정하는 좁은 시각으로는 가족농이라는 생활양식이 직면한 위기의 성격을 충분하게 논할 수 없다. 가족농은 특정한 농업경영 단위이기에 앞서 인류 역사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된 생활양식의 하나다. 웬델 베리(W. Berry)는 이렇게 설명한다. “가족농이란 한 가족이 농사짓기 충분할 정도로 작으며, 고용한 사람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그 가족이 ‘직접’ 농사짓는 농장을 뜻한다. 가족농은 한 가정이자, 농장을 소유한 가정의 일터이기도 하다. 여기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시장에 내다 팔 작물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작물을 생산하는 동안에 해당 장소의 건강과 쓸모를 책임감 있게 지키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뜻이다.”

  가족농을 근간으로 삼은 한국 농업이 심각한 지속가능성 위기 앞에 놓여 있다. 가족농의 미래가 어둡다. 농가의 영농후계자 확보율이 10%도 되지 않는다. 현재 농가의 농지 상속자는 90% 이상이 비농업인인 상황에서 비농업인의 농지 상속을 금지하는 것도 어려운 현실이다. 가족농의 세대간 지속은 고사하고 당장의 농업 노동력 부족이 심각하다. 고용 농업 노동력, 농작업 위탁, 농기계, 농약 및 비료 등 영농에 투입해야 할 자원을 시장에서 사들여야 한다. 그리고 복잡해진 시장 경로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농산물을 판매해 현금을 마련하기 어렵다. 즉 투입과 산출 양 측면에서 시장 의존성이 높아졌다. 이렇게 가족농의 가계(家計)가 외부화됨으로써 일어나는 현금 흐름 수요를 감당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현금을 얻으려면 상품화된 농식품 생산 및 유통 시스템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그 시스템은 충분한 농가 잉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급적 자기완결적인 영농 체계 속에서 가계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종래의 가족농은 흔들리고 있다. 상업화․전문화․단작화의 궤적에 올라타지 못한(또는 않은) 소규모 가족농은 생계를 위해 농업 외 부문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농사를 지어 가족을 먹여 살리고 땅(농장)을 돌본다’는 원초적 의미의 가족농은 날이 갈수록 견디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지속가능성 위기에 직면한 지금에 와서야 가족농을 일종의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선택하고 생애사를 다시 쓰려는 젊은 귀농인이 늘고 있다. 기존의 식품체계에 편입되는 것 자체가 ‘가족농 생활양식’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대안적인 먹거리 공급 네트워크를 추구하는 운동도 확산되고 있다. 로컬푸드 운동이나 ‘꾸러미’로 대표되는 공동체 지원 농업(CSA)이 활성화되고 있다. 위기와 도전이 교차하는 현재, ‘가족농’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한국 농업에서 가족농의 다수는 말 그래로 소농이지만, ‘가족농의 위기’가 ‘소농의 위기’라는 뜻만은 아니다. 가족농의 위기는 산업 자본주의 체제가 부과한 피로사회를 거부하고, 저주와도 같은 성장신화에 저항할 비판적 생활양식의 진지(陣地)가 위협받고 있음을 뜻한다.


* 이 글은 강원도민일보 기고(2017.2.21.)를 일부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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