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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과 보상 그리고 인정-농업 보조금을 대하는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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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16년 10월 28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정작 본인은 농산물을 값싸게 사먹으면서도 ‘값싼 농산물 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경쟁력 없는 농업, 부가가치 생산 능력 떨어지는 농업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건 아깝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놀란다. 보조금 집행의 효율성이나 예산 규모의 충분성 등을 따지기 전에 농업 보조금을 바라보는 관점을 짚어보자. 농민들을 두고 ‘돈 달라고 떼쓰는 사람들’이라고 싸잡아 막말하는 그 사람들은 농업 보조금을 빈자(貧者)에게 던져 주는 적선쯤으로나 알고 있는 건가? 다른 한편으론, 시장에서는 농업·농촌의 다원적 기능에 대한 가격이 지불되지 않으니 이를 보상(報償)할 특별한 보조금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농업 보조금은 적선 아니면 보상일 뿐일까? 여기에 인정(認定)이라는 차원을 덧붙여보자.
 

그 존재자체를 존중하는 게 인정

교통사고 피해자가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어 입원했다. 가해자가 치료비 등 보상금을 전달했지만 병실에 코빼기도 안 보인다.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다고 치자. 즉, 보상은 했으되 인정(認定)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법률적으로 문제없을지 몰라도, 잘했다고 말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물론, 형식적으로 문병하고서는 치료비 한 푼 보상하지 않는 거짓 인정의 사태와 비교할 일은 아니다. “한 그릇의 밥과 국 한 사발을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한다면 죽는 경우가 있다손 치더라도, 온갖 욕을 하며 듣기 싫은 소리로 준다면 길 가던 나그네도 그것을 받지 않을 것이요, 그것을 발로 차면서 준다면 거지도 받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맹자의 말도 있다. 인정은 사회적 관계의 최저선이다. 보상이나 적선에 우선한다.
 

그런데 ‘인정한다’는 말은 오인될 소지가 있다. 누군가 ‘진상 고객은 왕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고객은 왕’이라는 말 자체가 비틀린 사회적 인정 관계를 나타낸다. 상품을 구매하면 왕으로 인정하고, 구매하지 않으면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소비 능력의 ‘아우라’를 온몸에 휘감고 이탈리아제 가방이 즐비한 백화점 1층 매장에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설 때나 존재를 인정받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일 년에 몇 편 정도 논문을 써야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대학 교수들, 논문 한 편 쓸 때마다 연말 성과급이 올라가는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박사들은 과연 무엇으로 사회적 인정을 받는 걸까? 학술논문이라는 걸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논문은 교수 자리나 연말 보너스와 교환되는 부적(符籍)일 뿐이다. 그 뜻을 제대로 읽고 비평하는 이 없어도, 그걸 가진 사람에게 이익이 오게 만드는 신통방통한 ‘글자’를 부적이라 한다. 자기가 쓴 논문이 부적으로 취급될 때 학자는 인정받았다고 고마워해야 하는가, 무시당했다고 모욕감을 느껴야 하는가? 인정은 보상이나 대가 지불 따위의 행위로 등치될 수 없다. 어떤 사회 구성원의 존재와 그이가 하는 일,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 인정이다.
 

보상·대가 지불 따위로 등치 안돼

농정에서도 사회적 인정 관계를 회복하거나 적절하게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농촌 지방자치단체에서 귀농인에게 이사비 혹은 주택 수리비를 보조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토박이 주민 사이에서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집고치는 데 쓰라고 단돈 만 원도 받은 적 없다. 새로 이사 왔다고 해서 귀농인에게 수십만 원 또는 일이백만 원의 돈을 주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불만이 나온다. 기실, 필요한 돈을 못 받았다는 불만이 아니다. ‘수십 년을 살아온 곳에서 인정 혹은 존중 받지 못한다’는 항의다.

농민 생산자 입장에서 비용과 수고를 금전 가치로 환산하여 따지면, 친환경농업을 하지 않는 게 남는 장사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농민들이 유기농업을 실천하는 건 그들이 장삿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농민’임을 인정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화가가 돈 되는 상업 일러스트레이션을 제작할 기량이 충분함에도 배를 곯으면서 굳이 ‘자기 그림’을 그리는 건, 돈보다 예술가로 인정받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기는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다.
 

국민이 낸 세금을 농민에게 직접 현금으로 주는 게 직접지불제다. 요즘 일부 신문에서 오도(誤導)하고 있지만, 직접지불제 등의 농업 보조금은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농민들이 돈 달라고 떼를 쓰니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떼어 주는’ 적선이 아니다. 어떤 직접지불제가 몇 가지 이유에서 농업 활동의 가치에 대한 보상인 것은 맞지만, ‘보상’이라는 말로 그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기는 어렵다. 농업 직접지불제는 보상이기 전에 농업 활동과 농업의 주체인 농민에 대한 사회적 인정에 기초한 제도이다.
 

농업보조금, 사회적 인정의 형식

농업 보조금은 한국 사회의 한 부분을 떳떳하게 담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형식이어야 한다. 한편으론 농민과 농민 아닌 자의 동등함을 인정하는 ‘권리’ 보장의 수단이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론 나와는 다른 일을 하는 농민 고유의 활동-농업이 지닌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 통합의 수단이어야 한다. 시장에서 교환되는 상품의 가격은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생산자의 존엄성을 온전히 대표하지 못한다. 상품 가격이 사회적 가치를 대표한다면, 우리는 농산물 가격이 올라갈 때는 농민을 그만큼 더 인정하고 내려갈 때에는 무시해야 할 테다. 이치에 닿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 인정은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존재 자체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 내게 편익을 주기 때문에 딱 그 편익의 크기만큼 화폐로 대가를 지불하고서 ‘인정한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가치는 보상 혹은 대가지불의 명분이기에 앞서 인정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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